걷고 쉬고 생각하고
20년 만의 4월 추위에 눈까지 왔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 흉노(匈奴)에 끌려간 한(漢)나라 미인 왕소군(王昭君)의 비운을 읊은 동방규(東方虯)의 시구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피부로 느끼는 계절.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내려 곧장 공원으로. 이 시는 오랑케 땅에 풀과 꽃이 없어 봄 같지 않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이 공원은 만발한 벚꽃으로 환하다. 다만 을씨년스런 날씨에, 이곳이 비운의 넋들이 떠도는 곳이기에 스산하게 느껴지리라.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순직한 궁내부대신(李耕稙)과 연대장(洪啓薰)등 호위 장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헤, 고종의 명으로 초혼당(招魂壇) 1동과 부속 건물을 2 채를 짓고(1900년), 해마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남산 동쪽 기슭의 이 공원은 남산공원의 일부처럼 되어 현재 남산공원이 관리하고 있는데, 제사는 그 후 폐하고 ‘장충단 터’만 남아있다. ‘獎忠壇址’ 표지석에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제사하기 위해 광무4년 설치했던 제단 터라고 새겨 있고, 장충단비(서울유형문화재 1호)가 서있다. 앞면은 순종이 황태자 때 쓴 글 ‘獎忠壇’이 새겨 있고, 뒷면은 민영환이 쓴 기록이 씌어있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에 뽑아버렸는데 광복 후 다시 세웠다고.
생태연못을 끼고 가면 수표교(서울유형문화재 18호). 개성 선죽교를 닮았다는 이 다리는 연꽃 봉오리와 연잎 모양의 난간이 아름답다. 다리를 받치는 돌 교각이 2단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두 단이 서로 어긋 맞쳐져 있는 게 특색. 윗단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치게 하여 저항을 막고 있다고. 이 다리는 원래 청계천에 있어 물 깊이를 재어 홍수를 대비했다는데, 복개 공사를 할 때 이곳으로 옮겨 왔단다.(1959년)
개천을 따라 올라가니 자그마한 호수로 백천폭포가 ‘봄의 교향악’을 연주하며 흘러 내린다. 그 동안 사람이 느끼는 봄은 봄 같지 않았지만, 자연은 봄의 교향악 서곡을 피아니시모로 조용히 연주하고 있었으리라. 벚나무에 기대어 섰다. 남산의 울창했던 소나무들이 일제 강점기에 벚나무로 대치되었다가, 광복 후 훼손되고 또다시 심겨져 이렇게 상춘객을 부르고 있구나. 돌과 나무도 사람의 역사에 따라 이렇게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되풀이한다니...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 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 날 이 자리에 서린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 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60년 대 유행했던 배호의 가요가 귓가에 맴돈다. 그는 낙엽송 고목을 쓸어안고 애달팠던 지난 날의 추억을 더듬고 있지만, 나는 벚나무에 기대어 고난의 역사를 돌아본다. ‘다담애뜰’ 쪽으로 다시 내려오니 문득 맞은 편의 이준열사 동상이 나를 부르고 있다.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파견되었으나(1907년),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거기에서 분사한 것이다. 한편 저 건너편에서는 사명대사 동상이 서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휴정 휘하에서 왜군과 싸워 평양을 수복하고, 권율과 함께 의령에서도 왜군을 격파한 것이다. 독도문제와 위안부 문제로 일본과의 쇳소리 같은 마찰음이 예민한 때, 이 공원을 이렇게 걷고 있다.
나무 데크 층계를 따라 올라갔다. 잔뜩 찌푸린 날씨까지 겹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데, 길 건너 동국대쪽 벚꽃이 화사하다. 양쪽으로늘어선 벚나무 사이로 걸으니, 소년시절 고향 남산 층계를 오르내리던 추억이 아련구나. 일본 신사가 있던 그곳은 성역이었지. 벚꽃이 만발할 때는 달빛 속을 걷는 것 같았고, 한꺼번에 질 때는 화문석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도끼에 찍히고 톱으로 베어지고...
중턱에 오르니 벚꽃 놀이 나온 사람들로 제법 북적인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벚나무가 많지만, 뭐니뭐니 해도 남산의 벚꽃이 가장 볼만하다. 산림청 임업연구원 분자유전학 연구실에서 한․일 왕벚나무의 DNA 지문 분석을 벌인 결과, 한라산이 원산지임을 규명했으며, 제주도에서 왕벚나무 자생지 두 곳을 발견 천연기념물로 등록(1965년)했다니, 부질없이 국화 문제로 아렇궁저렇궁할 일이 아니다.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덩달아 꽃비도 한 잎 두 잎 내리는구나. 겨우내 운동을 제대로 못한 탓인지 다리가 뻐근하기도 하고, 우산 준비도 안했으니, 서울 타워로 올라가는 갈림길에서 되돌아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