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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학 접기

종이새가 깐 알

by 최연수

“ 짹 짹 짹 짹”

수 십 마리의 참새 떼들이 밝아오는 동녘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사자산은 두 팔을 벌리고 이들을 끌어안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 산은 일본에서 가장 높고 신령한 산으로 여기는 후지산을 그대로 닮았다 해서, 장흥 후지산이라고 불렀다. 후지산 봉우리를 단숨에 기어오른 해가 맑게 씻은 얼굴을 내밀며, 온 누리에 밝은 햇살을 뿌리자, 해맞이를 위한 또 한 무리의 참새들이 재호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재호는 눈을 비비며 댑싸리비를 들고 철재네 집 앞으로 뛰어갔다. 철재는 고등과생으로, 동동리 통학단장이다. 일장기를 어깨에 맨 철재형은 아이들을 줄 세워 남산으로 데리고 갔다. 오늘 따라 일장기의 해가 더욱 크고 고와 보이며, 그대로 하늘로 떠오르면 해보다 더 빛나 보일 것 같았다.

4월 8일. 이날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전쟁에 대한 칙어를 읽고 새로운 결의를 하는 날인데, 등교하기 전에 동동리 통학단이 먼저 신사 참배하는 날이다. 나뭇잎이나 검부러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으나 계단을 쓸면서 올라갔다. 며칠 전 어깨에 맨 화려한 꽃가마를 들어올렸다 내렸다가 하면서, 전통 옷을 입은 일본 청소년들이 신나게 벚꽃 축제 하나마츠리를 벌이며 내려오던 그 계단! 활짝 핀 사쿠라가 하늘을 가렸고, 사이사이에 섞여 있는 소나무와 동백나무 잎으로, 밝은 햇살이 미끄러지면서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다.

“ 꿩 꿩 꿩 ”

장끼가 푸드덕거리며 날아 올라가자, 까투리가 풀숲 사이로 잽싸게 기더니 뒤따라 날아갔다. 휘파람새, 방울새, 할미새, 찌르라기...갖가지 새들은 키 작은 관목 가지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고운 노래를 불렀다.

활터를 끼고 돌아, 금방 하늘 높이 날아올라갈 것 같이 커다란 날개를 펼쳐든 도리이를 지나면서, 남자아이들은 풀린 단추를 꿰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여자아이들은 손가락 빗으로 머리를 빗었다.

문설주를 가로질러 매진 굵은 새끼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하얀 종이가 꽂혀있고, 한가운데 길게 늘어뜨려진 새끼줄 꼭대기에는 커다란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철재 형은 이 새끼줄을 붙잡고 방울을 흔든 후, 손뼉을 세 번 치고 합장을 한 채,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큰절을 했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숨을 죽이며 따라 했다.

“ 덴노헤이까(天皇陛下), 우리 일본이 꼭 이기게 해주십시오 잉. 아마데라쓰오미까미(天照大神), 우리 아부지 돈 많이 벌어 갖고 빨리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잉!”

재호는 이렇게 입 속으로 빌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재호는 참새처럼 날아갈 것 같았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 풀이 난다’는 속담을 생각했다. 그토록 간절하게 절하며 빌었으니, 천황은 살아있는 신인데, 안 들어줄 리 없다고 믿었다. 올 봄에는 사쿠라가 유난히도 눈이 부시도록 곱게 피어, 남산은 마치 눈으로 덮인 것 같았다.

일본이 미.영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무찔러 동양의 평화를 이룩하겠다며,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동남 아시아에 전쟁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를 무렵, 재호는 ‘야마또(大和)공립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담임인 노무라 선생님은 사쿠라꽃 같이 희고 여윈 얼굴을 한 일본 여자인데, 아이들이 알아듣건 말건 일본말만 썼다. 물론 성도 이름도 일본식으로 고쳐 불렀다. 최재호는 ‘야마구찌 사이꼬(山口在浩)’였다. 성을 가는 놈은 개새끼거나 미련한 곰 손자 놈이라며 버티던 할아버지도, 재호의 입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받아들였다. 재호는 이렇게 입학하자마자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천황께 충성을 다짐하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앵무새같이 외우고, 천황은 영원하리라는 국가 ‘기미가요(君が代)’를 부르며, 신사 참배를 하는 일본 사람이 되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온 재호는 용왕수가 눈에 띄지 않아, 불안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 엄니, 왜 용왕수가 없다요?”

“ ................”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동쪽 하늘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샘에서 달 그림자를 긷는 것을 용알을 긷는다고 했고, 용알이 담긴 샘물은 신성이 담긴 물이라 했다. 이 용왕수를 떠놓고 동쪽 해를 향해 손을 비비며 치성을 드리던 어머니의 기도가, 요즘 웬 일인지 시들해졌다.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고 했는데........

“ 용왕수보단 동방요배를 해야겄는디, 한아부지 땜에 못히여......”

“ 그믄 한아부지 몰래, 하재 그래요?”

“ 그라다 들키믄 니 에미 송장 치게?”

“ 둘 다 하믄 안 된다요?”

“........................”

신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온 재호는, 학교 가기 전에 단 몇 마리라

도 더 접어야 했다. 비싼 색종이는커녕, 헌 신문지도 마련하기 힘들 때여서, 될 수 있는 대로 작게 그리고 빨리 접으려고 서두는데, 그럴수록 일은 더디고 엉성하게 접어진 것 같았다. 세어보고 또 세어

보고.....접는 일보다는 세어보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나 마음만 손놀림에 앞설 뿐, 늘기는커녕 오히려 주는 것만 같았다.

“ 핵교는 언제 갈라고 해찰을 부려.....”

“ 종우 학 접는당께로...... ”

“ 고것이 니 소원을 풀어준다냐?”

“ 천 마리만 접으믄 된당께 그라네.”

“ 씨잘 데 읎는 짓이여. 시적거리지 말고 핵교나 가.”

“.................”

어머니의 기도가 시들한 게 마음에 걸려, 제딴은 더욱 부지런히 접노라 하는데, 칭찬은커녕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머니의말투가 재호는 몹시 언짢았다. 그래도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재호는 아버지가 속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틈 나는 대로 이렇게 종이학을 접고 있는 것이다.



1) 고등과(高等科)...국민학교에 부설된 초급 중학 과정

2) 통학단(通學團)...집단 등하교를 위한 동리 단위의 조직

3) 일장기(日章旗)...일본의 국기(히노마루=日の丸)

4)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일본의 승리를 위해 매월 8일 한 장소에 모여 전쟁에 대한 칙어를 읽으며 다짐을 하는 날

5) 하나마츠리(花 祭り)...일본 사람들의 꽃축제

6) 사쿠라(櫻)...일본의 국화(벚꽃)

7) 신사(神社) 참배...일본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곳에 가서 경배를 드리는 것

8) 도리이(鳥居)...신사 입구에 세워진 큰 문

9) 덴노헤이까(天皇陛下)...찬황폐하, 일본의 왕

10) 아마데라쓰오미까미(天照大神)...일본의 개국 시조

11) 태평양전쟁...1941년 12월 일본이 미국.영국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

12) 창씨개명(創氏改名)...한국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고치는 것

13) 황국신민(皇國臣民)서사(誓詞)...천황에 대한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 맹세

14) 기미가요(君が代)...천황은 영원하리라는 일본의 국가

15) 동방요배(東方遙拜)...동쪽 도쿄에 있는 일본 궁성을 향해 절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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