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새가 깐 알
○월 ○일 ○요일 맑음
가슴이 후끈거리고 신물이 넘어왔다. 꽁보리밥에 고추부스러기 국물만 먹다시피 한 탓일까? 곱창과 순대를 비롯해서 그 많은 음식물이 즐비한데, 하필이면 그 호박떡이 늘 내 발목을 붙잡을까? 불그스레한 호박 줄기와 팥고물로 범벅된 그 떡이, 임신한 여인처럼 참으로 먹고싶었다.
호주머니는 비어 있으니 훔쳐먹는 도리밖에 없었다. 떡장수 아주머니는 남의 속도 모르고 나더러 맛있는 떡이라며 사먹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훔쳐 달아나면 도둑놈 잡으라고 앙칼지게 소리칠 것이다. 그러면 잽싸게 따돌리며 요리 조리 피해야 한다. 며칠 동안 미로를 미리 익혀두었기 때문에 안심이다.
그러나 막상 동명시장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빅톨 유고의 ‘레 미제라블’ 이 떠올랐다. 빵 한 조각 훔쳐먹고 19년 옥살이를 해야 하는 쟝발잔이나, 호박떡 한 개에 징역살이를 하는 내가 다를 바 없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린다. 도둑질도 아무나 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용기가 없어 실천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시장을 지나왔다. 여느 때보다 더 허출했다. 마음만 먹고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도 범죄일까? 이런 것을 절도 미수범이라고 하는 것일까?
○월 ○일 ○요일
학교 근처에 방 한 칸을 얻었다. 염치없이 떼를 써서 얻은 것이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문간방인데, 구들장이 드러나 있고 도배도 되어있지 않다. 거미줄이 널려 있는데 가마니를 깔고 우선 들어왔다. 이삿짐이라야 이불과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이 전부다. 솥은 아궁이에 걸려 있으니 다행이다.
등잔불도 없이, 주인 아주머니가 주신 신문지로 장판 삼아 깔고, 비록 곰팡이 냄새나는 이불이나마 덮고 누워서, 어두운 허공에다 일기를 쓰고 있으려니까, 마치 천국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다. 며칠 동안이지만 손바닥만한 방 한 칸에서, 춘자 추자네 온 식구들 틈에 끼어 잠을 잔다는 것은 감옥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함께 살며 자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쌍동이네 신세를 질 줄을 꿈엔들 생각했으랴. 비둘기 새끼 이름을 춘자 추자로 지었던 지난날 일이 자꾸만 생각나서 미안했다. 하나님을 믿는다니,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아, ‘만나’ 빵집이 잘 되기를 빈다.
○ 월 ○ 일 ○요일 맑음
문을 열고 나가려니까 갑자기 어지러우면서 눈앞이 껌껌해졌다. 눈을 감은 채 기둥을 붙잡고 한동안 서있었더니 정신이 돌았다. 학교 가는 발걸음이 약간 휘청거린 듯 했다. 네 끼를 굶은 모양이다. 오늘은 점심 시간에 뒷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그냥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 재호는 폐병 걸린 거 아녀?”
등뒤에서 도시락을 먹는 학우들 중 누군가 하는 말이었다. 걱정하는 말인지 비웃는 말인지....
6교시에 체육이 있어 운동장으로 나갔다. 아직은 추운데 웃옷을 벗겼다. 구멍이 숭숭 뚫린 런닝셔츠가 창피했다. 운동장을 돌리는 기합을 받다가 한 바퀴도 돌지 못하고 끝끝내 쓰러졌다. 가지만 앙상한 푸라타나스 밑으로 업혀와 땅 위에 누워 있는데 새들이 재잘거렸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천부께서 기르신다고 하였다는데... 하기야 공중에 나는 새라야 그렇지 이렇게 누워있는 새를 누가 길러주랴. 배고프다.
○ 월 ○일 ○요일 흐리고 바람
아주머니께서 갖다주신 고추잎이 떨어졌다. 김치가 먹고싶어 죽을 지경인 판에 참으로 별미였는데.
오늘은 마침 바람이 세게 불어서 다행이었다. 어둠을 헤치며 장독대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장독대 옆 닭장에서 선잠을 깬 닭들이 술렁이는 것 같았다. 금방 꼬꼬댁거릴 것 같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용기를 내!”
나를 채찍질하며 뚜껑을 여는데 손이 마구 떨렸다.
‘ 하느님! 실패하면 안돼요. 호박떡은 실패했지만......’
된장을 헤집는 손끝에, 고추잎이 잡히는 그 촉감은 무어라 비길 데 없었다. 다시 된장을 눌러놓고 뚜껑을 덮는데 닭들이 더 술렁대는 것 같았다.
런닝셔츠가 땀으로 젖어있었다. 성공했다는 쾌감도 잠깐,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가슴을 죄기 시작했다. 닭들의 소리에, 주인 아주머니가 안방 창구멍으로 내다보았을지도 모른다.
‘ 내가 귀 막고 방울 도둑질한 게 아닌가?’
“ 아니야. 용감했어. 용감하고 말고!”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나를 격려했다. 그래도 불안하다.
‘ 한 접시만 더 주셨어도 안 그랬을 텐데, 아주머니가 너무 인색해...’
이렇게 나를 변호해봤으나 여전히 불안하다.
‘ 이 비밀을 이렇게 일기로 남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절도범의 증거가 되는 것이니까...’
된장을 헤집던 내 수많은 손자국들이 정령처럼 어두운 방안을 어지럽게 떠도는구나. ‘ 하느님, 제발 잠들게 해주십시오!’
○월 ○일 ○요일 맑음
날씨가 약간 풀렸다. 내복 빨래를 하고 있는데 뜻밖에 추자가 찾아왔다. 그는 가랑머리를 하고 있었다. 자기가 빨아주겠다고 하는
걸 사양했다. 그는 국화빵과 유과를 싸 가지고 왔다. 홀아비 냄새가 날 누추한 방안으로 차마 들어 오라 할 수 없어, 길 건너 들판으로 데리고 나갔다.
밭둑에 함께 앉아 있으려니까 부끄럽고 쑥스러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여자아이와 둘이서만 나란히 앉아 있어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누가 볼까봐 몹시 불안했다.
“ 넌 아즉도 가시내 같구나?”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머슴애’ 같이 활달했다. 아직은 식지 않은 빵 한 개를 건네주었다. 어렸을 적 만리성 군만두보다 훨씬 맛있었다.
“ 왜 ‘맛나집’이 아니고 ‘만나집’이냐? ”
별로 할 말이 없어, 틀린 글씨나 바로잡아주려고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만나는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새벽마다 내려주셨던 양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아직 어머니만 안 믿는다고 했다. 나도 예수를 믿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럼 오늘의 빵은 나에게도 ‘만나’가 된 셈이다. 몇 끼니 양식은 되겠구나.
“ 너 기꾸장 좋아했지?”
“..........................”
“ 니 첫사랑이 기꾸장이었냐?”
“...........................”
그는 갑자기 기꾸장 이야기를 꺼내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재호는 몹시 당황했다. 사랑 이야기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그의 대담성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 너 여자 친구 있어?”
“ 아니....”
왜 그런 말을 건네는지 참 이상했다. 그는 이광수의 ‘흙’과 박계주의 ‘순애보’를 읽어봤느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까 옛날의 추자가 아니었다. 가슴이 불룩하고 엉덩이도 펑퍼짐한 게 제법 처녀티가 났다. 꽤 소설을 읽은 것 같았으나, 어쩐지 긴 이야기를 하는 게 내키지 않아 건성으로 대답했다. 종종 오겠다며 그는 떠났는데, 그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꾸장이 나의 첫사랑이었느냐는 물음은, 옛 추억의 엘범 속으로 나를 이끌고 갔다. 국화빵과 기꾸고! 지금쯤 기꾸장도 추자만큼 처녀티가 나겠구나.
○월 ○일 일요일 흐림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산길에서 또 영식이
의 습격이나 받지 않았을까? 고장이나 나지 않았을까? 불안하고
지루해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아버지의 답장을 다시 꺼내어 읽었다. 아버지가 징용 갔을 때 이후 처음 받아본 편지가 아닌가? 허락 없이 가출했던 재호를 용서하며, 오히려 휴학하라 했던 아버지가 경솔했노라고 사과를 했다. 그리고 동아일보 신문 지국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굶지는 않을 거라고 하면서, 어린 나이에 자립해보고자 하는 나의 의지가 대견스럽다고 하였다. 짧은 편지지만 읽고 또 읽고....
드디어 버스가 연착했다. 보내준 양식을 받아든 기쁨을 어디다 비하랴. 어깨에 메고 뛰다시피 돌아오는데 땀이 비오 듯 했다. 땀나고
무겁다는 것이 이렇게도 행복하다니. 전봇대마다 쉬면서 부모님께 감사했다. 뭐니뭐니 해도 배고픈 설움과 비할 수 있을까? 하기야 6.25 때는 굶어도 죽지 않기만을 바랐는데 사람이 참 간사스럽다. 쌀자루를 웃목에 놓고 보니 부자가 따로 있으랴.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 했지 않은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았던가?
○월 ○일 ○요일 눈
방안에 씻어놓은 쌀그릇에 살얼음이 얼었다. 문을 열어보니 눈이 하얗게 쌓이고 지금도 내리고 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은지 오래 되고 보니, 냉 구들은 오히려 내 덕을 보려고 한다. 석유 곤로로 밥을 지어먹는 일이 참 편리하고 경제적이지만, 방안이 한대지방 같구나. 에스키모인 같이 차라리 얼음집을 지어놓고, 기름을 태워 불을 피우면 훈훈할 것이다.
이불과 요를 함께 묶어 침낭을 만들어 놓고 보니 마치 굴 같구나. 북극곰 되어 몸뚱이만 드나들다보니 게을러진다. 얼굴만 내놓고 공부를 하는데 냉기가 코를 베어가려 한다. 입김이 허옇다. 이러다가 콧구멍에 고드름 열릴라. 얇은 내복 한 벌이라도 껴입으면 얼마나 좋으랴. 겨울은 싫다 추위는 정말 싫다.
○ 월 ○ 일 ○요일 맑음
제법 크로바가 푸룻푸룻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뜯어와서 깨끗이 다듬었다. 아주 부드러워서 소금에 저리고 고춧가루만 뿌리
면 김치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꾸만 의문이 생겼다. 왜 사람들은 먹지 않을까? 토끼들에게는 양식이 되어도, 사람에게는 독이 되는 어떤 성분이 있는 것인가? 쓰디쓴 익모초도 약용으로 쓰이고, 억센 무우청도 식용으로 쓰이는데, 왜 토끼풀은 먹지 않게 되었을까? 확실하게 알아보지 않고는 먹을만한 용기가 나지 않는다.
오늘도 소금물에 고춧가루를 뿌려서 반찬으로 먹었다. 참기름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맛있을 것 같다. 자꾸 눈물이 난다. 눈물로 빵을 찍어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노라고 시인 괴테가 말했던가? 너무 김치가 먹고싶다. 밥을 먹게 되니까 이제는 김치 투정이구나.
갑자기 사람이 그리워진다. 왜 나는 늘 혼자 있는가? 혼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여러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영식이는 지금도 게릴라 활동을 할까? 그리고 병문이는 왜 복학을 안 했을까? 그도 입산했을까?
○월 ○일 ○요일 흐림
눈을 뜨니까 아직도 머리카락 탄 노린내가 방안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까 앞머리가 제법 탔다. 머리카락 끝이 노릇노릇하고 짧아졌다. 어제 밤늦도록 공부하다가 석유 등잔불에 그을린 것이다. 누가 보면 공부하는 척 한다고 비웃겠구나.
마지막 국어 시험도 잘 보았다. 다른 학우들은 이런 시험도 있느냐고 투덜대었지만 나는 오히려 자신 있게 썼다. 늘어놓은 여러 개의 단어를 맞추어 문장을 지은 것인데, 문학 서적을 많이 읽은 탓인지 술술 쓸 수가 있었다.
1학년 때처럼 고학을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복학이 늦어 학우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이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