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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야 웃지마라

종이새가 깐 알

by 최연수

해동이 되면서 다행히 전황이 유리해진 것 같았다. 학생연맹에 가입했던 아이들은 경찰서에서 해준 ‘학생연맹증’을 가지고 복학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재호를 복학시키려는 낌새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끼니를 걱정하는 판에 학교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휴학을 하고 이듬해에 복학하라는 것이다. 재호는 재수할 때와 마찬가지로 문밖 출입도 하지 않았다. 회색 눈발이 재호의 마음속에 빙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월 ○일 수요일 흐리고 눈

아침부터 눈발이 날렸다. 이제 봄이 왔나보다 생각했는데 동장군은 후퇴할 줄을 모른다. 길가에서 천곤이를 만났다. 인공 때 붉은 깃발을 흔들고 김일성 장군 노래를 부르며 궐기대회에 앞장섰다는데, 지금은 저렇게 반공 애국자가 되어 태극기를 흔드는구나.

오래도록 보이지 않았던 내가 혹시 입산했다가 내려오지 않았나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것이 어이없다.

낮에는 쥐가 되고 밤에는 새가 되는 박쥐들은 저렇게 활개 치고 사는데, 왜 나는 날개도 펴지 못하는 것일까? 철새들은 철 따라 저렇게 맘대로 옮겨 사는데, 왜 나는 이렇게 움츠리고 앉아서 기지

개도 켜지 못한 것일까? 간색인 분홍꽃들은 저렇게 만발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피지도 못할까?

6.25 때 부역했던 사람들도, 스스로 백로라면서 흰빛을 자랑하며 잘 사는데, 간신히 목숨만을 건진 우리는 이렇게 까마귀 꼴을 하여 백로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놈들은, 일제 때는 왜놈들한테,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 정부에 붙어서 저렇게 출세하고 부자 되어 잘 살고 있지 않는가?

할아버지께서 학교를 그만 두고 닭 장사나 하라 했을 때의 마음의 상처가 그다지도 아렸었는데, 이제는 아버지조차 휴학하라고 하신다.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왜 우리 집은 이렇게 평생동안 애옥살이를 해야 하는 것인지...... 국민학교 시절 외웠던 옛 시조가 생각나는구나. 이 시조나 읊으면서 스스로 위로해야겠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다 하여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런 일기를 써둔 그 이튿날, 재호는 우연히 막 시동이 걸린 광주행 트럭을 발견하고 다짜고짜 올라탔다. 물론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가출한 것이다. 지금까지 어른들 말씀에 불순종했던 일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 뜻을 거역한 것이다.

유치면을 지나서 광주로 가는 길목에는. 예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은 산 호젓한 절이 있다. 가지산은 큰 산은 아니지만 주변에 같은 높이의 산들이 10여 개나 겹치면서 산무리를 이루고, 이들 산세가 화순 영암 강진 장흥까지 이어져 산과 골이 깊다.

그리고 보림사는 통일신라시대에 한국 불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첫 절로 세워졌는데, 가지산 자락에 감싸여 아늑한 정취를 풍길 뿐만 아니라, 국보급 문화재가 천년을 살아 숨쉬고 있다. 이곳이 공비들의 아지트가 되면서부터, 토벌대와의 싸움이 잦고 교통이 거의 두절된 곳인데, 트럭이 여기를 통과하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큰 모

험이었다.

자욱하게 덮인 관목 숲은 벌써 봄기운이 돌기 시작해서 유난히 반짝이고, 갈잎 냄새가 배어나는 맑은 공기는 천년의 고요를 더해가는데, 터덜거리며 산을 오르는 트럭은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짐짝 위에 올라앉은 사람들은 누가 시킨 듯이 일제히 엎드리고, 그야말로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긴 채 미리 준비해온 이불보를 온 몸에 둘러썼다. 공비들에게 발각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요행만을 믿고, 피재 고갯길을 올라가던 트럭이 속도를 줄이며 커브를 돌자마자 갑자기 우뚝 섰다.

“ 손들고 죄다 내려와!”

“..................”

“ 줄 서! 돈 내놔!”

상상과 현실을 미쳐 분간하지 못한 채, 모두들 부들부들 떨며, 호주머니를 뒤져서 돈을 내놓았다. 한 사람은 총부리를 겨누고 한 사람은 몸을 뒤졌다. 재호는 6.25 때와 같이 아랫도리의 힘이 쫙 빠지더니 오줌이 마려웠다. 차라리 돈이나 있어서 모조리 줘버리면 오죽 좋으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못내 겁이 났다. 재호의 차례가 되었을 때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고 있는데, 가슴팍을 더듬던 공비의 거친 손이 심장 위에 와 멈췄다.

“ 재호야, 무섭냐?”

“...............”

재호는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이 깊은 산중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재호는 대답은커녕 눈도 깜박거리지 못하고 그의 눈초리만을 응시했다.

‘ 아, 영식....’

재호는 반겨야 하는지 모르는 척 해야 하는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왜 하필이면 이 곳에서 영식이와 마주칠 것인가?

“ 으디 가?”

“.................”

“ 나 몰라 보겄지야?”

“ 알아.”

영식이는 재호의 등을 툭 치더니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생긋 웃었다. 입 냄새는 물론 온 몸에서는 찌든 땀 냄새가 역겹게 코를 찔렀다. 남바위를 쓴 것 같은 머리에는 가시랭이가 어지럽게 붙어있고, 얼굴은 구레나룻이 덥수룩해서 마흔 살도 더 되어 보였다. 바지 가랑이가 너덜너덜 찢겨져 있고, 운동화인지 발싸개인지 아무렇게나 발에 낀 신은 걸레 그대로였다.

“ 넌 아즉도 자라지야?”

“..........”

재호는 웃음이 아니라 눈물이 갈쌍갈쌍 넘치려 했다. 백년소에서 멱감던 시절로 되돌아간 영식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익살을 잊지 않았다. 재호는 영식이를 위로해야 하는 것인지, 격려해야 하는 것인지......

“ 넌 차 타!”

“.................”

영식이는 먼저 차에 오르더니 그 거친 손으로 재호의 팔을 끌어 올렸다. 때꼽재기가 앉은 영식의 손등은 터져 피가 나고 있었다. 그는 샅샅이 짐을 뒤졌다. 쓸만한 것을 모두 끌어내리고, 한 청년의 등에 지웠다. 그리고는 출발하라고 손짓을 했다. 운전사는 코가 땅에 닿을 만큼 연해 절을 하며 헨들을 잡았다. 토끼 용궁에 갔다온 듯한 사람들도 그저 손을 비비며 굽실거렸다.

“ 신고하믄 안돼!”

“................”

“ 부붕 부루룽-”

시동 소리도 차체도 아직 떨린 채 차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재호는 그 동안 잊혀졌던 병문이의 운동화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비록 헌 것이지만 얼른 벗어 내던졌다. 영식에게 줄 것이라고는 그 것 밖에 없었다. 짐을 지고 비틀거리며 따라가는 그 청년의 뒷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무너진 것 같았다. 아주 납치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것인가?

‘그러면 공비가 되는 것인가? 아니야. 짐만 운반해주면 돌려 보내

줄 거야. 만약 영식이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렇게 짐을 지고 끌려가는 것이 아닐까?’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별별 생각이 등골을 오싹하게 하였다. 곰과 같은 몰골을 한 영식이의 얼굴이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자꾸만 콧날이 시큰거렸다. 때로는 죽도록 미워하면서, 그러다가도 또 못 견디게 그리워하면서, 누구보다도 가까이 지내었던 죽마고우!

‘ 자수하면 용서한다는데, 내가 자수를 권유했어야 했을까? 아니야, 내가 권유한다고 그가 자수할 사람이 아니지....’

별별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모두들 아직도 긴장을 풀지 못하여 한 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광주까지 갔다. 아직도 길바닥은 차가운데, 졸지에 맨발이 된 재호는 전에 자취했던 집을 찾아갔다. 이미 집주인이 바뀌었다. 다행히 맡겨둔 이불 짐과 부엌 살림은 되찾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그 동안 광주로 이사와 산다는 춘자 추자 쌍동이네를 수소문하여 가까스로 집을 찾았다. 유리창에 ‘만나집’이라 써붙이고 국화빵과 유과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들은 의붓어머니 밑에서 ‘헨젤과 그레텔’ 동화 속의 과자 집을 뜯어먹고 산다는 말을 곧잘 했는데, 지금도 빵집 과자 집을 뜯어먹고 사는 셈이다. 쌍둥이네 식구들의 시선이 곱지는 않았지만, 며칠동안 신세를 졌다. 그 옛날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신세를 질 줄이야 . 비둘기 새끼 이름을 춘자 추자로 지었던 일인들 설마 그들이 알랴.

그리고 학교를 찾아갔다.

“ 니가 빨갱인지 아닌지 뭘 보고 알아?”

담임선생님은 ‘학생연맹증’도 없이 불쑥 나타난 재호에게 따귀를 한 대 갈기고, 친구들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6.25 때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자칭 백로가 되어 까마귀를 비웃기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겉 희고 속 검은 백로들을 정말 가려낼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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