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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새 발자국

종이새가 깐 알

by 최연수

겨울로 접어들면서 다시 시국이 어수선해졌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해서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노라고 기뻐한 것이 엊그제인데, 중공군이 참전해서 유엔군이 다시 후퇴하고 있다는 보도가 신문에 실렸다. 날라리 꽹과리 소리에 맞추어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인해전술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는 친절한 해설까지 곁들어서.

“ 마오뚱 군대 와해믄, 오성홍기 또 달아 해......”

왕서방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중공군은 침략자인데 저럴 수 있을까? 그 무감각이 얄밉기도 했지만 그 태연함이 부럽기도 했다. 왕서방네는 오색기와 청천백일기와 오성홍기가 한 상자 안에서 함께 의좋게 산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치는 대로 깃발을 바꿔 달면 되는 것이다.

해가 바뀌자 서울을 내주고, 멍석말이 하듯한 전선에 쫓겨 피난민 대열은 또 남쪽으로 밀려 내려 왔다. 부산이 아니라 이번에는 제주도로 간다고 했다. 공비들의 기세는 다시 드높아져 여기 저기에서 유격전이 치열해졌다. 또 얼마나 많은 해골들이 산골짝에서 뒹굴고, 얼마나 많은 피들이 발갛게 강을 물들일 것인가?

재호는 눈발선 회색 구름에 짓눌린 가슴을 열기 위해서 저고리 단추를 다 풀고, 창문도 활짝 열어젖뜨렸다. 찬바람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며, 앵두 코에서 콧물이 주룩 흘렀다. 드디어 싸락눈을 뿌리더니, 눈발이 하나씩 둘씩 흩날렸다. 재호는 가위눌림 같은 꿈에서 어서 깨어나야겠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집을 나갔다. 한여름 소나기를 퍼붓듯이 함박눈을 펑펑 쏟아 부어주면 속이 탁 트일 것 같았다.

재호는 예정이나 한 것처럼 동쪽으로 발길을 내딛었다. 지난 여름의 그 피난길을 따라 몽유병자처럼 걸었다. 갑자기 겨울 바다가 보고싶었기 때문이다. 십 년 전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어보았으나 겨울 바다의 정경은 한 조각도 없었다.

사자산을 옆에 끼고 걸어가는데, 옆으로 바라보는 사자산 자락은 앞에서 바라보던 그 후지산과는 전혀 딴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똑같은 산도 보는 위치와 보는 시각에 따라 저토록 달리 보이는구나.’

마치 무슨 중대한 진리라도 깨닫는 것 같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산자락 따라 새빨간 동백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수문리는 생각보다 큰 포구였다. 어렸을 적의 마량리와는 사뭇 달랐다. 까막섬이 떠있지 않아 못내 아쉬었으나, 활처럼 완만하게 휘어진 길고 넓은 모래톱이 무척 정겨워 보였다. 꽤 커진 눈발과 꽤 센 바닷바람에, 입안이 은단을 씹은 것 마냥 시원하고, 박하 사탕을 먹은 것 같이 가슴조차 후련해졌다.

갈매기!

어렸을 적 그 갈매기들이 여기까지 나들이를 나왔는지, 아니면 그들의 아들딸들이 이 곳에 장가들고 시집와서 또 아들 딸 낳고 사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재호는 헛된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이 눈을 비비며 몸을 추스렸다. 바위 위에 전시해놓은 조각품이란 말인가? 아니면 박제품이란 말인가? 재호를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돌린 채 꼼짝 않고 서있는 썰렁한 모습에 안절부절 했다. 저 갈매기들도 이 백성들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밀고 밀리는 해풍과 육풍에 시달리며 이골이 난지도 모를 일이다.

“솨아- 찰싹”

게다가 먹물을 풀어놓은 것 같은 새까만 바다를 배경으로, 온 우주가 어둠만 꽉 차있는 커다란 창고 같았다.

“솨아- 철썩”

꿈틀거리는 용 무리 같은 바닷물이 밀려와, 갈매기들의 발자국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물러났다. 또 한 무리의 파도가 운동화 콧등에서 시커먼 혀를 날름거리더니 역시 남은 발자국들마저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태연했다. 장난인지 심술인지 바닷물은 참으로 얄밉게 굴었다. 그런데 재호의 입술 사이에서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정말 어울리지 않은 뜻밖의 일이었다. 이 어둠의 창고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본능인지도 모른다.

“ 하이얀 모래밭에 물새 발자국.

바닷물이 사르르 어루만져요.

고 발자국 예쁘다 어루만져요....”

토라진 친구에게 슬며시 말을 걸어보듯이, 갈매기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몇 번이나 되풀이 부르고 나니까, 섭섭했던 마음이 눈처럼 조금씩 녹아 내리고 얄미웠던 심술쟁이 바닷물도 오히려 사랑스런 어머니 같이 느껴졌다. 젖을 빨리며 머리를 쓰다듬던 엄마의 그 부드러운 손으로, 예쁜 발자국들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 이 동요를 지은 분은 참 마음이 곱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참으로 모든 일들이 마음먹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 아닐 것인가? 재호는 갈매기 떼들이 쉬고 있는 바위 가까이 가서 자리를 잡았다. 갯강구들이 잽싸게 몸을 숨기고 앙증맞게 어슬렁거리던 아기 게들도 덩달아 구멍을 찾아들었다. 지난 여름의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아서 쓴웃음을 삼켰다. 따개비와 굴 껍데기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바위에서는 미역 냄새가 났다. 꽃향기보다 은근한 그 냄새가 그나마 좋았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와 소나무들은 제법 흰 털모자를 쓰고 있었으나, 바다에 내리는 눈은 쌓이기 위해서 내리는 게 아니라, 녹기 위해 내리는 것이었다. 전혀 다른 종류의 눈 같았다.

갈매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맞으며 조는 듯이 멍청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서있는 갈매기들도, 날아다니는 갈매기와는 또 다른 종류의 새들로 보였다. 어쩌면 바위 위에 덩그렇게 앉아있는 재호도, 그들 눈에는 되바라지고 약삭빠른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인종으로 보일런지도 모른다.

재갈매기 새끼는 어미의 부리에 있는 붉은 점을 쪼아 먹이를 조른다고 했다. 새끼들이 그 붉은 점을 쪼면 어미 새는 먹이를 토해서 먹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미의 모양대로 판지를 오려내고, 부리에 빨간 칠을 해서 새끼들에게 내밀면, 새끼는 어미로 착각하고 그 붉은 점을 쪼며 먹이를 조른다고 했다. 이 때는 진짜 어미가 와도 모른 체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정으로 새끼를 기르는 게 아니라, 다만 본능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 나도 가짜 어미 새의 붉은 점을 쪼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일까? 진짜 어미 새가 와도 모른 체 할 새끼 갈매기가 아닌가?’

생물부에 잠깐 몸담고 있을 때, 귀담아 들었던 재갈매기 이야기가 문득 생각나서 쓴웃음을 웃었다.

해가 짧은 탓인지 멀리 수평선 너머로부터 어둠이 밀려오면서, 금방 사방이 어스레해졌다. 조그만 고깃배 두 척이 나뭇잎처럼 뒤뚱거리며 선창가로 들어왔다. 비로소 갈매기들이 일제히 너울거리며 마중 나갔다. 죽음의 바다가 금방 되살아난 것 같았다.

‘ 그래, 살아있어야 해!’

‘ 중공군이 몰려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우리도 제주도로 피난 가기 위해서 이 곳으로 와야 하는가? 그럼 저 가랑잎배에 목숨을 싣고, 파도와 싸우며 남해를 건너가야 한다는 말인가?’

가까스로 안정을 찾은 재호의 가슴이 갑자기 메스꺼웠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불쑥 불쑥 고개를 드는 이런 상념에는 재호는 어찌할 수 없이 포로가 되고 만다. 위에서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아래서 후려치는 파도로 뒤똥거리며 배 멀미가 난 것 같았다. 다시 인공 시대가 된다면 가만히 앉아서 죽고 말지, 또 그렇게 살고싶지 않았다. 얼떨결에 당한 일이었으니까 망정이지, 빤히 알고 있는 그런 생지옥 생활을 되풀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잇 빌어먹을......”

조약돌 하나를 주워 던졌으나 바다는 날름 삼켜버리고 또 입을 벌렸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여 온다는 속담대로, 굴 껍데기 투성이 같은 무거운 발걸음을 되돌렸다. 소금에 절고 비린내가 벤 듯한재호의 옷이 가죽처럼 뻣뻣해졌다. 발자국만이 눈길로 꾸준히 따라왔다. 그러나 내리는 눈은 발자국들을 금새 덮어버렸다. 밀물에 의해서 물새 발자국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듯이, 눈에 의해서 눈 발자국들도 깨끗이 덮어졌다. 저 밀물 같은, 저 눈 같은 그 무엇이, 전쟁의 발자국이랑 사상 싸움의 발자국이랑 모든 지난날의 뼈아픈 흔적들을, 송두리째 지워버리고 덮어버리면 오죽 좋으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발목이 빠질 정도로 눈이 쌓였다. 밤은 깊어가도 눈빛 때문에 세상이 환했다.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수많은 젊은이들이 읍사무소 앞을 지나 장흥교를 건너갔다. 강제로 끌려온 것인지 자원해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다만 핫바지 저고리에 검정 고무신 차림과 고슴도치 같은 머리카락들......포로로 잡혀가는 패잔병들이나 시베리아 유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들이 저럴 것이었다.

자동차를 타는 것도 아니고 눈길을 걸어서 보성 순천을 지나 하동 마산으로 계속 간다는 것이다. 주먹밥이라도 요기를 했는지 못했는지, 그들의 초췌한 얼굴에는 불안과 공포가 역력했다. 칠성각에서 치성 들여 낳았을지도 모를, 쌍방울 달렸다고 금이냐 옥이냐 자랐을 그들. 가문 대를 잇고 선영 지키며 조상님 제사를 모실 그들. 그러나 남자들만의 이 추하고 천한 행렬은 차라리 짐승 떼들이라고 해야 옳았다. 국민방위군이라고 했다. 전세가 더욱 불리해지면,

또 총알받이로 내몰릴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모처럼 바닷바람을 쏘이고 눈길을 걸으면서, 그 동안 쌓였던 모든 찌꺼기들을 깨끗이 청소하겠노라고 했는데, 재호는 이 날 밤도 엎치락뒤치락 뜬눈으로 새웠다.



1) 오색기(五色旗)... 적,황,남,백,흑의 중국 국기(1912-1928)

2)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1950년 12월, 만 17세 이상 40세 까지 제2국민병이라는 이름으로 소집하여 집단으로 피난하도록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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