쫀쫀해서 치명적인 냉우동 면발의 추억
이제부터 돈 관리를 철저히 하겠어! 2020년을 맞이하는 첫 다짐이었다. 우선 지난 몇 달의 지출을 정리해봤다. 교통비는 얼마가 나갔고, 휴대폰 기계값이 몇 달이 남았고, 기프티콘 선물은 월 얼마가 나가고... 이런 걸 정리하는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결제가 몇 개 있었다. 평소 나는 술도 안(못) 마시고, 맛집을 찾아가는 성향도 아니다. 큰돈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왜 한 번씩 4~5만원이나 하는 밥값이 나왔을까... 하다가 무릎을 쳤다. 아. 소개팅.
어쩐지 결제처 이름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유럽 어딘가를 연상하게 하는 가게 이름이다. '에반스빌', '포코펠리체' , '호우 비스트로' , '스피카나폴리' 주로 파스타를 먹었다. 소개팅이라는 경기장에서 파스타는 축구장의 축구공이다. 의문을 가졌던 적도 있다. 왜 파스타여야만 하는가. 가성비도 안 좋고 식상하기만 한데. 더 맛있고 가성비도 좋은 걸 먹으면 신선한 이미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부동의 챔피언 파스타에 처음 도전한 음식은 냉우동이었다. 소개팅 당일은 폭염이 절정인 날이었다. 퇴근시간 지옥의 신도림을 지나 온 소개팅녀는 첫만남때부터 더위에 지쳐 있었다. 그분의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시원한걸 먹자. 우리는 합정역 근처 냉우동 맛집에 갔다. 지난 주 친구와 만나 맛있게 먹은 가게였다. 한 주 사이에 맛이 바뀌었을 리 없지. 자신있게 냉우동 두 개를 시키고, 친구와 왔다면 결코 시키지 않았을 사이드메뉴까지 주문했다.
냉우동은 탱글탱글한 면발이 특징이다. 맛있는 한 끼 식사로는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소개팅은 식사가 아니었다. 허기를 채우는 것보다 서로를 알아가는 게 더 중요한 자리다. 냉우동의 쫀쫀한 식감은 독이 되었다. 상대에게 질문을 하고 나서 면을 입에 넣으면, 한참을 오물거려야 한다. 앞에서 상대가 내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는데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양 볼에 질긴 면발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오물오물거리면서 네 네 하는 꼴을 서로 보여줄 수는 없었다.
결국 그 분도 나도 면발의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반 이상을 남겼다. 대화도 못하고 배도 고픈 어정쩡한 상태로 가게를 나왔다. 포크로 말아 숟가락에 올려 한입에 쏙 넣는 파스타가 그리웠다. 당연히 소개팅 상대 분은 그 뒤로 만나지 못했다. (냉우동 때문이다....진짜....) 남들이 다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이 나이들수록 도전을 기피하고 보수적으로 되는 지 깨달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