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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알로고스_투어
(경주 대릉원 1)

with 플라톤 1 Plato

by 리얼흐름

경주의 이른 아침, 대릉원 돌담길은 물기를 머금은 풀 냄새로 가득했다.
잔디 사이로 박힌 이슬이 햇살을 받아 유리알처럼 빛나고,
멀리서 들려오는 까치 울음은 고분의 고요함을 더 깊게 만들었다.

진우는 가장 큰 봉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늘 속에서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때, 등 뒤에서 낮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언덕에 묻힌 사람은 진짜로 여기 있는 걸까?”

고개를 돌리니, 고대 그리스식 히마티온을 걸친 남자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는 눈가에 잔주름이 깊게 파였지만, 시선은 또렷했다.

플라톤: “여행자여, 나는 이곳이 이상하다네. 돌과 흙이 만든 언덕이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왕을 본다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진우: “이곳은 죽음을 기리는 동시에, 삶을 보존하려는 장소예요. 우리는 무덤에서 역사를 배웁니다.”
플라톤: “그렇다면, 자네가 보고 있는 건 ‘왕’인가, 아니면 ‘왕의 흔적’인가?”


두 사람은 고분 사이 오솔길을 걸었다.

길가에는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봉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발목을 스쳤다.

진우: “한국의 무덤은 무섭지 않고, 정원처럼 느껴집니다.”
플라톤: “그런데 자네 시대엔 죽음을 어떻게 대하나?”
진우: “우리는 죽음을 피하고, 오래 사는 법을 찾으려 애씁니다.”
플라톤: “그렇다면 죽음을 알면, 사는 법도 변할까?”
진우: “아마도요.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겠죠.”


플라톤은 조약돌 하나를 꺼내 빛에 비췄다.
환영처럼 동굴 속 장면이 눈앞에 나타났다.

플라톤: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그림자를 진짜로 믿지. 자네 시대에도 그러한가?”
진우: “네. 우리는 스크린 속 이미지를 더 진짜로 여길 때도 있습니다.”
플라톤: “스크린?”
진우: “빛으로 만들어진 그림자 같은 거예요.”
플라톤: “흥미롭군. 자네는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진짜를 구분하나?”
진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며 직접 보고 느끼려 합니다.”


바람이 봉분 위를 가르며 잔디를 일렁이게 했다.

길가의 은행나무에서 노란 잎이 한 장, 진우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진우: “당신이 말한 이데아… 그것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플라톤: “이곳의 이데아는 ‘영원한 기억’일세.”
진우: “그건 변하지 않나요?”
플라톤: “기억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해석은 변하네.”
플라톤: “그런데 자네, 왜 혼자 여행을 하나?”
진우: “혼자 있어야 제 질문이 선명해집니다.”
플라톤: “고독은 철학자의 벗이지.”


경주대릉원플라톤본문.png


해가 높아지며 봉분의 그림자가 짧아졌다.

잔디 위로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들렸다.

플라톤: “내 시대의 아테네와 비교하면, 이곳 사람들은 더 평화로워 보이네.”
진우: “여긴 오래된 도시지만, 전쟁의 흔적은 적습니다.”
플라톤: “자네 시대엔 전쟁이 없나?”
진우: “총 대신 데이터로 싸우는 전쟁이 많죠.”
플라톤: “데이터라… 그것도 그림자 아닌가?”
진우: “맞아요. 하지만 영향력은 실재합니다.”
플라톤: “그림자가 실재를 위협한다니, 동굴이 더 깊어졌군.”


다시 처음의 벤치로 돌아왔다.

바람에 플라톤의 옷자락이 흙먼지를 일으켰다.

플라톤: “자네는 왜 이곳을 택했나?”
진우: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공간이라서요.”
플라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가르쳤네. 자네 시대에도 가능한가?”
진우: “아직 어렵습니다.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플라톤: “그 두려움의 원인은?”
진우: “잃을 게 많아서요.”
플라톤: “그렇다면, 가진 걸 줄이면 자유로워질까?”
진우: “아마도, 하지만 현대인은 욕망에 너무 익숙합니다.”
플라톤: “욕망도 그림자일세.”
진우: “그림자를 없앨 수 있을까요?”
플라톤: “없애는 게 아니라, 빛을 따라가야지.”


고분 입구 쪽으로 걸으며, 가을 햇살이 둘을 감쌌다.

플라톤: “여행자여, 자네는 이곳에서 무엇을 배웠나?”
진우: “진짜를 보기 위해선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플라톤: “그리고 나는 자네에게서 배웠네. 자네 시대의 동굴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걸.”
진우: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의 시대를 비춰준 거네요.”
플라톤: “맞네. 철학은 시대를 넘어 대화를 이어주는 등불일세. 우리는 또 만나게 될 걸세”


진우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플라톤을 또 만날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 그때에는 다른 질문을 꼭 해볼 생각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후에도 묘한 설렘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대릉원의 경치 때문인지 플라톤과의 만남 때문인지...

샤워 후 숙소의 창문을 열자 이제는 제법 완숙한 가을바람이 적절한 습기와 온도로 얼굴을 덮었다.

노트와 펜을 꺼내 탁자가 아닌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침대의 커다란 베개에 등을 기댄 후 볼펜을 지긋이 물고 오늘의 만남을 생각했다.

"경주, 대릉원. 오늘 나는 플라톤을 만났다. 그는 이데아와 그림자의 비유를 통해 진짜를 보는 법을 말했다. 하지만 그와의 대화에서 현대의 동굴은 돌벽이 아니라 스크린과 데이터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속에 살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아마도 어느 시대에나 인간은 모두 빛을 향해 한 걸음씩 더 나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종교, 전쟁, 재앙, 무지의 시대, 혹은 야만의 시대에도 분명히 존재했다. 당연히 '동굴'도 언제나 존재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아닌 시선과 마음으로 꾸준히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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