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이페르케르 (이집트 대신관)
작년 가을에 플라톤을 만났던 경주에 다시 왔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작년에는 은행잎이 쌓이고 흩날렸는데 지금은 도시 전체에 벚꽃 바람이 불고 있다.
'나도 달라진 것이 없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 판단은 나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잠시 머물다가 벚꽃 향과 함께 사라졌다.
경주역에서 아주 오래된 옛 것의 자전거를 빌렸다.
봄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오후, 바람은 부드럽고 공기에는 벚꽃 향이 섞여 있었다.
대릉원으로 이어지는 돌담길을 달리다 보니, 담 너머로 둥그스름하게 솟은 고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자전거 바퀴가 자갈길 위에서 부드럽게 소리를 냈다.
한참 달리다 고분 옆에 놓인 벤치를 발견했다.
자전거를 세우고 물병을 꺼내려는데, 길 건너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짙은 갈색 로브가 바람에 스쳤고, 목에는 황금빛 장신구가 빛났다. 햇살을 받아 번뜩이는 그 얼굴에는 고대의 시간이 얹혀 있었다.
남자: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소?”
진우: “두려움의 대상이죠. 사라진다는 공포요.”
남자: “죽음은 소멸이 아닌 통과일세. 문을 지나면 다른 질서가 기다리네.”
진우: “문이라니... 그 너머를 본 사람이 있나요?”
남자: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지. 이집트에서는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소.”
진우: “죽음을 준비하는 삶... 무섭지 않았나요?”
남자: “아니 그것이 오히려 삶을 온전히 만드는 방식이었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릉원 사이의 벤치에 앉았다.
진우: “우리는 죽음을 금기처럼 여기죠.”
이페르케르: “그건 문을 잠그는 행위요. 영원은 닫힌 자에겐 오지 않네.”
진우: “그런데 왜 죽음을 생각하면 불안해질까요?”
이페르케르: “그대는 아직 그 문 앞에 서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
진우: “문 앞에 서는 건 어떤 느낌이죠?”
이페르케르: “삶이 한 번에 투명해지는 순간이네.”
진우: “투명해진다...”
이페르케르: “가치 없는 것은 흐릿해지고, 가치 있는 것만 또렷해진다네.”
진우는 벤치에 기대 고분을 바라봤다.
진우: “여기 사람들은 고분을 그냥 무덤이라고 생각해요.”
이페르케르: “사실은 영원의 구조물이지. 죽은 자를 위한 공간 같지만, 실은 산 자가 영원을 상기하도록 만든 것이라네.”
진우: “산 자를 위해서?”
이페르케르: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삶은 깊어진다네.”
진우: “그럼 삶을 깊게 한다는 건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가요?”
이페르케르: “그렇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로 두는 것일세.”
진우: “그건 쉽지 않네요.”
이페르케르: “쉽지 않기에 가치 있는 것이네.”
바람이 불자 벚꽃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진우는 가방에서 쑥떡과 식혜를 꺼냈다.
진우: “쑥떡 드셔보시겠어요?”
이페르케르: “이 초록빛은 봄의 맛이군.”
진우: “네, 어릴 때부터 먹던 건데 향이 참 진하죠.”
이페르케르: “죽음이 겨울이라면, 이런 맛이 삶의 봄일 테지.”
진우는 식혜를 한 모금 마셨다.
현대 문물을 모를 수 있으니 작은 페트병의 뚜껑을 열어 이페르케르에게 건넸다.
진우의 모습을 깊은 눈으로 보던 이페르케르도 따라 마셨다.
진우: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망각일지도 모르겠네요.”
이페르케르: “좋은 말이네. 망각은 문을 지워버리는 것이니까.”
진우: “그 문을 통과하면 정말 다른 질서가 있는 건가요?”
이페르케르: “우리 믿음에 따르면, 그곳에는 심판이 있네. 그러나 심판은 벌이 아니라 균형이지.”
진우: “균형이라...”
이페르케르: “삶에서 무겁게 쌓인 것은 내려놓고, 가벼운 것은 품고 가는 것.”
진우: “그건 조금 위안이 되네요.”
이페르케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진우: “그럼 지금 나는 뭘 해야 할까요?”
이페르케르: “살아있다는 사실을 매일 의식하게. 그것이 문을 준비하는 길이네.”
진우는 오래돼서 삐걱대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페르케르: “문은 멀리 있지 않네... 하지만 서두를 필요도 없지...”
진우: “오늘 대화를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이페르케르: “기억이 아니라 실천으로 남기게.”
진우는 가벼운 인사를 하고 고분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가다 잠시 멈췄다.
멀리서 돌아본 벤치에는 아직도 이페르케르가 대릉원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난 그는 고분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사라진 그를 보고 진우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며 생각했다.
“경주, 대릉원. 고분의 둥근 곡선 위로 벚꽃이 흩날렸다. 쑥떡의 향과 식혜의 달콤함 사이로,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말이 오래 남는다. 피라미드와 대릉원 사이에서 이페르케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확실한 것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만이 오히려 삶을 더 선명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