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장자 Chuang-tzu
택시가 안동 하회마을 셔틀버스 정류장 앞에 멈췄다.
진우는 셔틀버스를 타고 굽이치는 강을 끼고 달렸다.
창밖에는 강물이 둥글게 마을을 감싸 흐르고, 너른 들판 위로 초가집 지붕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하회는 이름 그대로 물이 휘감아 흐르는 마을이었다.
산의 곡선과 강의 곡선이 만나 한옥 지붕선을 감싸는 모습은 마치 오래된 수묵화 속 풍경 같았다.
진우는 버스에서 내려 돌길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급할 것도 계획도 없었다.
마을 어귀에서 느릿하게 펼쳐진 마당, 대나무 그늘 아래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지팡이 대신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고, 짚신이 발끝에서 벗겨져 있었다.
바람이 그의 소매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진우: “혹시...”
장자: “나인지, 바람인지, 알 수 없지.”
진우는 장자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 앞에는 이미 누군가 차려둔 소박한 먹거리가 놓여 있었다.
식혜에서 은근한 엿기름 향이 올라왔고, 유과의 표면에는 얇은 설탕 가루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진우: “아침부터 이렇게 한가롭게 계셨나요?”
장자: “시간은 아침이든 저녁이든 흐르는 물과 같네. 구분하는 건 사람일 뿐이지.”
진우: “움직이지 않아도 흘러간다는 건... 어떤 상태일까요?”
장자: “내가 묻지... 그럼 흘러간다는 건 움직이는 건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건가?”
진우: “저는 움직여야 흘러간다고 생각했어요.”
장자: “그건 자네 생각일 뿐... 강물은 제자리에서 도는 듯 보이지만 끝없이 흐르고 있지 않나?”
바람이 불어 대나무가 흔들렸다.
장자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흰 구름이 천천히,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움직이고 있었다.
장자: “저 구름이 흘러가는 건가, 아니면 우리가 흘러가고 있는 건가?”
진우: “어느 쪽이든, 결국 변화는 있네요.”
장자: “변화조차 붙잡으려 하면, 흐름은 멈추네.”
장자는 잠을 자듯 눈을 깊게 감았다.
바람에 나뭇잎 그림자가 얼굴 위로 드리웠다.
잠시 꿈을 꾼 듯 느리게 눈꺼풀을 뜨며 말했다.
장자: “나는 꿈에서 나비가 되었지. 그리고 깨어보니 장자였다네. 하지만 어쩌면 지금도 꿈속일지 몰라.”
진우: “저는 꿈을 꾸면 깨어나곤 했는데요.”
장자: “그 깨어남이 진짜일 거란 확신은 어디서 오는가?”
진우: “현실에서 만지는 것, 느끼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장자: “감각이 현실을 증명한다면 꿈속에서의 감각은 무엇이었나?”
진우: “그건... 그냥 상상이라고 생각했죠.”
장자: “자네 시대에는 상상과 현실을 나누는 경계가 분명한가?”
진우: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이 뒤섞이는 시대라서 사실 점점 불분명해집니다.”
장자: “그렇다면 이미 자네도 나와 같은 곳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네.”
진우는 유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식감과 함께 달콤한 엿기름이 입 안에 퍼졌다.
진우: “선생님이 말하는 무위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건가요?”
장자: “아무것도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네. 바람이 불면 잎이 흔들리듯 '진짜의 흐름'에 맡기는 것이네.”
진우: “그럼 노력은 필요 없나요?”
장자: “노력하지 않는 노력...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않는 마음이네.”
진우: “하지만 현대인은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잖아요.”
장자: “그 경쟁이 자네를 살리는가? 아니면 소모시키는가?”
진우: “둘 다요. 살리기도, 지치게도 하죠.”
장자: “그렇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에 자신을 두느냐가 중요하네.”
마을 뒤편, 강이 보이는 둔덕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물은 그들의 걸음만큼 느리게, 그러나 쉼 없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장자: “자네는 왜 여행을 하나?”
진우: “흐름 속에서 나를 찾기 위해서요.”
장자: “그 나란 게, 고정된 건가?”
진우: “적어도 변하지 않는 뭔가는 있다고 믿어요.”
장자: “그 믿음이 흐름을 막을지도 모르네.”
진우: “그럼 믿음 없이 살아야 하나요?”
장자: “믿음조차 흐르게 두면 되네. 붙잡지 말고.”
오후가 되어 구름이 조금 끼었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며 들판 위 보리 이삭이 일제히 눕듯 흔들렸다.
장자: “바람이 바뀌면 길도 바뀌지.”
진우: “그럼 원래 가려던 목적지는요?”
장자: “목적지란 잠정적인 환상일 뿐. 흘러가는 게 길이라네.”
진우: “그럼 계획을 세우는 건 무의미한 건가요?”
장자: “계획을 세우되, 집착하지 않는 것이 무위지.”
강가에 앉아 식혜를 나눠 마셨다.
시원하고 달큼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장자: “오늘 자네와 나눈 말이 기억에 남을까?”
진우: “남을 겁니다. 하지만 형태는 변하겠죠.”
장자: “그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게. 흐름은 변화를 통해 이어지네.”
진우: “그게 오늘의 답인가요?”
장자: “답도 흐르는 것이네...”
진우는 말없이 한 참을 장자와 함께 걸으며 생각했다.
"안동 하회마을. 강물은 마을을 감싸 흐른다. 나는 지금 장자와 함께 걷고 있다, 아니 흐르고 있다. 흐른다는 건 멈추지 않는 것이고, 붙잡지 않는 것이다. 나의 계획과 믿음마저 물 위에 띄워 보낼 수 있다면, 나는 더 가벼워질 것이다. 그것이 '진짜흐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