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
그렇지만 흰 종이를 펴 마주하면 거기엔 설렘과 기대가 있다. 우주가 있다.
가만히 바라본다. 가만히 응시하면 윤곽이 떠오른다.
따라 그리기만 하면 명작이 될 것이다.
이런 색감으로 칠한다면 아름다울 거란 느낌도 손에 잡힐 듯이 동시에 떠오른다.
그래서 영감이 이끄는 대로 윤곽을 그려보지만 그 윤곽은 희미해지고 조화로웠던 색깔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컴퓨터 화면이 하얗게 도화지를 마련해 주고 거기에서 깜빡깜빡 커서가 손짓할 때, 또는 줄 공책의 한 면을 새로 펴고 맘에 드는 볼펜을 손에 쥐었을 때 가슴이 두근대는 것을 내 귀는 느낄 수 있다
머릿속에 맴돌던 몇 개의 단어와 짧은 문장이 이끄는 늠름한 군대의 출정이다.
한 줄을 적어본다.
도화지에서 그렇게 흩어져버린 산과 강, 새와 나무, 그리고 한없이 따르고 싶은 그 여인의 뒷모습처럼
나의 글도 갈피를 잃고 가뭇없이 멀어진다.
지휘관은 힘이 없고 전략이 없고 병졸은 흩어져 각자도생이다.
일찍이 누군가는 말씀하셨지.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한 마리의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런 흥분과 실망의 반복은 질환이다.
태생적 질환이다.
글자를 알고 그 글자가 의미를 담는다는 것과 그 의미가 마음에 닿아 작은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본 다음에야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이 생의 의문을 이렇게 쓰면서 엿보려는 것이다.
언젠가는 소유하지 않음으로 그 새를 손에 올려보고 싶다.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는, 영민하게 반짝이는 까만 눈을 마주 보며 새의 울음을 가까이 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