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내복을 입고 있었다.
부엌 쪽에선 엄마의 기척이 가끔 들려왔다.
방안을 뒹굴다가 문지방 아래쪽으로 장판이 장판을 덮은 이음매를 들췄다.
쥐며느리가 지나갔다.
쥐며느리는 건드리면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지네의 아기처럼 생긴 노래기도 있었다.
노래기는 빨랐고 건드리기 싫었다.
장판을 다시 덮어놓고 천장을 쳐다본다.
천장에는 아라베스크무늬가 이어져 있다.
계속 쳐다보면 눈이 어지럽다가 조금 더 쳐다보면 무늬와 무늬가 겹친 부분이
진해지면서 나머지 부분은 뿌옇게 희미해진다.
시선을 옮겨 가다 다른 판과 이어 붙인 부분에서야 패턴이 깨짐을 느낀다.
바닥도 천장도 샅샅이 보았다.
벽지의 모양을 따라가다 무늬들이 끊어진 곳.
벽장이 눈에 들어왔다.
벽장을 열었다.
큼큼하고 시원한 바람이 몰려나왔다.
뒷걸음질 쳤다가 도움닫기를 해서 뛰어오른다.
두 팔을 짚어 간신히 벽장 턱을 오르면서 허리를 틀어 엉덩이를 걸친다.
벽장은 바닥부터 사방이 신문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벽장에 오르니 건드리면 가끔 매운 냄새를 풍기는 집게벌레도 지나간다.
조그만 놈은 물도록 두어도 그렇게 아프지 않다.
신문지들을 쳐다본다.
신문지에서 요상하게 생긴 한자들을 건너뛰고 네 칸짜리 만화를 찾아 읽는다.
그림들이 하는 말은 풍선 속에 있고 그 역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만화들이 마냥 좋았다.
따라 그리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벽장 안에는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많았다.
흑백사진이 있는 사진첩,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보따리들과 그 걸 싼 보자기, 이름 모를 것들.
푹신해 보이는 보따리에 기대어 벽장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들에 시선을 던진다.
아버지의 면도기가 보인다.
면도날을 놓고 위에서 판을 덮는 방식으로 양쪽으로 날을 사용할 수 있는 구조다.
덮개와 면도날의 틈에는 아버지의 수염이 빽빽하게 끼워져 있다.
그 옆에는 쓰지 않은 새 면도날들이 몇 개 있다.
면도날을 쳐다보고 있으니 집어보고 싶다.
집어 들어 가까이 보니 회색빛 면도날의 양쪽 끝 부분이 희게 빛난다.
예리하고 얇은 네모난 면도날이 요상한 흥분을 몰아온다.
이걸로 살을 베면 베일까? 아플까?
면도날은 멋지고 예쁘고 게다가 새것이다.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지거나 수풀을 헤치다 가시에 찔린 적은 있어도 예리한 무언가에 제대로 베어본 적이 없었다.
면도날은 내 손에 있었지만 왠지 실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방문을 열기 전에는 장난감들끼리 서로 말도 하고 술래잡기도 한다는 것처럼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듯 생소했다.
쓸모를 확인하기 전에는 나를 실질적으로 위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날카로운 것에 베인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이지만 그게 실제로 나를 벨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들어서 아는 것과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의 차이만큼의, 딱 그 정도의 긴장이 있었던 듯하다.
왼손바닥을 내려보면서 검지에 면도날을 갖다 대었다.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이내 오른손에 힘을 주어 주욱 그었다.
아프다기보다는 면도날의 폭만큼 잠깐 뜨거웠다.
피가 나지 않는다.
나는 베이지 않았다.
순간, 그었던 금을 따라서 핏방울이 송골송골 올라온다.
뜨거웠던 그 금을 따라 피가 솟구친다.
몸 전체에 소름이 확 끼쳐오면서 덮치는 공포에 숨이 막힌다.
벽장을 어떻게 뛰어내렸는지 모른다.
마구잡이로 피를 닦아낸다.
으악 아악 소리를 지르면서 회색 내복의 바지에, 윗도리 아랫자락에 검붉은 피를 묻혀가면서 악을 악을 쓰며 울었다.
엄마 엄마 부르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울었다.
죽을 것 같았다.
이 순간 아무도 없으면 무서워 죽을 거 같아서 피 칠을 해가면서 엄마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