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停滯)의 정체(正體)

정체 (브런치 시작3)

by 열목어


시를 적어놓고 하루에 한 번씩 본다.

움켰던 감정과 다른 길로 가버린 시를 바라본다.

떠오르지 않는다.

중간에 끼워 넣고 덧붙여 바로잡을 단어가 없다.

며칠이고 바라본다.

미동이 없다.

한 날, 고동색 흙을 뚫고 움이 튼 것 같기도 하다.

날개가 솟는지 지켜본다.

더디다.

멈춰있는 사진 같다.

어제보다 자란 건가.

그 움의 잔상을 밀리미터 단위로 재놓고 노트를 덮는다.

서성이다 앉고 누워 머릿속의 싹을 바라본다.



마음이 답답했으나 무엇이 답답했는지 알 수 없다.

억지로 그리다 그려진 그림.

참고 보아주기 힘들다.

도용과 전형의 선들이 허풍선이의 추상화 같다.

창의의 색깔이 없다.

둔해진 감각.

물이 섞여든 가솔린.

불이 붙지 않는다.

돋보기로 확대해 보려던 사물들.

애써 보았으나 거기엔 바람이 없었다.

머물러 막혔다면 어떤 것이라도 고였을 텐데.

수원의 고갈이 의심되었다.



샘이 있다.

비가 내려 세상이 가쁜 습기로 가득할 때 샘은 충만했다.

가뭄에 대지가 갈라지고 바람이 마른 먼지를 불어 일으키며 샘이 말라간다.

모두 말라버린다면 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바닥을 긁어보았다.

수문은 열려있었다.

문은 조절이 되지 않는 결함이 있었다.

쏟아낼 때 쏟고 닫아야 할 때 닫을 수 없는 감염된 자율신경에 연결되어 있었다.

내압을 견디지 못했다고 해야겠다.

정체된 답답함이 빈뇨와 같이 왔다.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머물러 막혔다면 어떤 것이라도 고였을 텐데.

흐를 때 보이지 않던 정체가 샘의 바닥에 어린다.

바를 정자의 획수가 모자라 어디 한 구석이 이지러져 있다.

고백이 결여된 모습이다.

이런 모습으로 글을 적었다는 게 부끄럽다.

오탁은 보이지 않게 감춰놓았다.

나의 샘은 사람의 마음에 닿을 만큼 맑았나.

흙물에 떠오른 나르시스의 실루엣이 가엾다.

먼 나라의 진폭변조 주파수처럼 외롭다.



'이'를 '은'으로 고쳐도 문장은 달라진다.

수백억이나 되는 경우의 수.

그 숲에서 나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뼈와 살을 갈라 들어가는 백정의 칼이 꺾고 틀어야 하는 낭비 없는 해체의 효율을 아는 것처럼 나의 펜도 마찬가지로 예리한 첨단으로 때로는 찌르고 때로는 베어 언어의 혼돈 속을 종횡무진 하고팠으나 마침표 없는 만연체의 문장엔 이처럼 진부한 허위가 가득 차 고담하게 오는 공명의 힘이 없다.

나는 급했다.

내 글을 기다리는 독자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찰칵하며 빛나는 하트모양의 관심이 받고 싶었나.

고개를 가로젓는다.

인정을 바란 것보다 공감을 바란 것은 사실로 보인다.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다

시간을 들여야겠다.

가슴에 들여놓은 말들.

시간을 들여 내보내려 한다.

참을 수 있게 된 것과는 다르다.

정체라 부르지 않으리.

고이는 물에 흙이 가라앉는 걸 지켜보련다.

맑은 물에 반영된 정체를 보겠다.



문득,

싹은 자라고 있는지.

움직임을 느낀다.

발아의 슬로모션이 포커스에 위치한다.

주변의 흔들림과 그림자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뾰족이 솟아난다.

원을 돌리며 자라 나온다.

구겨졌던 날개가 펴진다.

느린 바람과 뒤늦게 도착한 햇빛에 서서히 마른다.

배추흰나비의 날개다.

지평선 같은 수평이다.

합장 한 번에 정확한 직각을 보인다.

시를 놓친 방향으로 가벼운 날갯짓을 반복하기를 몇 번,

가느다란 다리를 늘어뜨리고 둥실 떠오른다.

뿌옇고 미지근한 장막이 걷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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