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지면 선명해지는

정체(停滯)

by 수필버거

스물여덟에 골프를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배웠다. 당연히 실력이 늘지 않았다. 운동은 장비와 폼이랬는데,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티칭 프로가 있는 연습장에 등록한 게 서른 즈음이다. 90년대 후반만 해도 공치는 내 또래가 흔치 않았다. 주말마다, 심지어 평일까지도 골프장으로 불러내는 사람이 많았다. 재밌었다. 하지만 그 재미의 뿌리는 알지 못했고 그냥 가자는 대로 경주로 부산으로 경기도로 신나게 돌아다녔다. 집에 붙어 있는 주말이 드물었다.


내 나이 서른에 큰 아이가 태어났고, 걷기 시작할 무렵 둘째가 세상에 나왔다. 갓난아기 일 때는 아빠가 할 일이 별로 없다. 퇴근해서 아기 컨디션 좋을 때 안고 어르고 재롱 보는 정도. 첫째가 걸음마를 시작하자 내 일이 많아졌다. 아내는 갓 태어난 둘째를 돌봐야 하니, 천방지축 첫째는 내가 봐야 시간이 길어졌다. 주말이라도 애 좀 보라는 아내의 타박이 잦아졌다. 자연스레 골프 치는 횟수가 줄어들다가 큰애와 다섯 살 터울인 막내가 태어났을 때 드디어 선택의 기로에 섰다. 어쩌다 골프채라도 만지작 거리면 아내의 눈흘김을 견뎌야 했고, 눈 질끈 감고 골프장 한번 다녀오면 골프와 상관없는 듯 상관있는 잔소리를 들었다. 결심을 해야 했다. 골프냐 아이들이냐.


살면서 내린 결정 중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서른 중반에 골프를 그만둔 것이다. 이웃들이 저 집은 도대체 어딜 저렇게 가냐는 수군거림이 있을 만큼 주말마다 온 가족이 놀러 다녔다. 매주 멀리 가지는 못했지만, 동네 놀이터, 청소년 수련원, 근교 대학 캠퍼스, 아무튼 어디라도 갔다. 다 큰 지금도 세 아이들은 지들이 어렸던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단다. 늘 어딘가에서 다섯 식구가 웃고 뛰고 밥 먹던 그날들을. 내가 지지고 볶고 살았어도 아직도 애들하고 끈끈한 건 그 시절 덕이라고 믿는다.


골프를 끊어도 한동안은 연락이 많이 왔다. 그때마다 마음이 들썩였다. 치고 싶었다. 어울리고 싶었다. 그늘집에서 마시던 차가운 맥주, 운동 뒤에 먹던 연하고 고소한 한우의 맛, 흥청이던 뒤풀이. 일 년쯤 지나자 공 치자는 사람이 확 줄었다. 전화나 문자도 어쩌다 한 번 올 무렵이 되자 골프 생각이 현저히 덜 났다. 그 1년 동안 애들하고 부쩍 가까워졌고 같이 킥보드를 타고 하다못해 공 던지기라도 하는 그 시간이 훨씬 재밌었다.


골프장과 거리를 둔 채 제법 긴 시간이 흐르고서 깨달았다. 나는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당시만 해도 고급 스포츠 대접을 받던 골프 치는 내 모습이 좋았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으쓱하는 마음, 뽐내는 심리, 인정욕구 충족 같은 것들이 스스로 골프를 좋아한다는 착각을 지어낸 건 아닐까 자각했다. 나는 오십 대가 된 지금도 골프는 치지 않는다.


글쓰기가 긴 답보 상태에 빠졌을 때도 가끔은 썼다. 오래 안 쓰면 쓰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다. 여전히 솜씨는 나아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쥐어짜듯 썼다. 쓰고 싶은 마음이 글 발행 후에 따라오는 재능에 대한 실망보다 컸다. 글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쓰고 난 후의 보람 같은 느낌이 좋았다.


쓰기의 림보에서 내 글쓰기를 생각했다. 골프와 비슷한 마음 아닐까 의심했다. 글쓰기에 대한 절함보다는 출간 작가에 대한 선망, 글 쓰는 사람이 풍기는 어떤 아우라 같은 걸 탐했던 건 아닌지. 어쩌면 인정 욕구.

내 속의 쓰고자 하는 욕망의 크기를 다시 살폈다. 그리 크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정체기가 길어지고 있었다.


간격 間隔
1. 명사 공간적으로 벌어진 사이
2. 명사 시간적으로 벌어진 사이
3. 명사 사람들의 관계가 벌어진 정도.

-네이버 사전


연인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건 간격 때문이다. 떨어져 보면 그리움이 크다는 걸 깨닫는다. 사귀기로 했던 순간 요동치던 심장, 길을 걸으며 주고받던 다정한 말과 손짓, 술잔을 부딪히며 둘이 나눴던 따뜻한 감정이 그리워 죽겠다면 여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언젠가 끝이 온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전화 하고 달려갈 일이다. 떨어진 시간, 멀어진 거리가 자기 속의 감정을 다시 보게 하고 가늠하게 만든다.


쓰지도 안 쓰지도 않는 시간에도 글쓰기에 관한 책을 자주 읽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진짜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건가. 그리고 장강명의 책을 만나게 된다. 글쓰기의 욕구에 다시 불을 붙이고 다시 열심히 쓰게 만들어준 고마운 책.


어져야 보이는 것이 있다.

멀리서 살피면 그제야 깨닫게 되고 알게 된다.

알면, 사랑한다.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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