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그대로 앉는다

정체

by 밝둡

손은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에 둔다. 시간은 한낮의 구름처럼 흐른다. 흐르는 듯하고, 하늘색을 삼켜먹는 솜사탕의 고요한 잔혹극. 발끝으로 바닥을 지그시 누른다. 공간이 얕은 개울물에 잠겨 있는 빨래하는 어느 여인의 발목처럼 퍼덕대고, 뒤틀렸다. 눈을 감아 본다. 눈 속에 숨어 있던 반짝이는 글자들이 등을 보이며 도망 다닌다. 어깨선을 보이며 사라진다. 늪의 위에 자음만을 남긴다. 모음들이 모여 바람을 일으켰다. 눈 감은 곳 아래 어디쯤으로 나의 시선을 데려간다. 미간을 찡그려 그것들을 쫒는다. 평범한 날 속에 뛰어든 한창 전쟁 중인 한 무리들을 지워내고, 그곳에 새벽에 들었던 음악을 흘려보냈다. 귀를 덮는다. 음악 속의 주인공이 한쌍의 풀벌레가 되어, 새를 피해 바다로 향한다. 바다를 들춰본다. 소금 없는 물이 뜨거운 태양에 끌어안겨 사라진다, 터 잃은 미역줄기는 가난쟁이 락커의 밥상 위에 올려졌다. 정신 못 차린 손을 다시 무릎 위에 올렸다. 무릎의 낭떠러지에 팔은 펄럭대고, 발등 위로 먼지가 간지럽힌다. 감은 눈 속에 형광빛이 새어 들어온다. 찡그린 이마 곁에서 구경을 하던 유행가가 보다 힘차게 춤췄다. 들춰진 바다가 힘없이 땅 위에 다시 떨어진다. 파도가 파도를 엎고 고향으로 떠나간다.


글이 글을 쫓아다니며 대화를 시도했다. 글이 대답을 하자, 글은 글을 받아 적고 글에게 글들을 훔쳐 글에게 건네주었다. 글이 글들 사이를 오가며 피로함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글은 글에게 흥미를 잃기 시작하였고, 글은 더 이상 글에게 글들을 내주지 않았다. 글이 죽을 것만 같은 고통으로 글의 발목에 드러난 글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글의 발목에 새겨진 글이 손으로 감추어지자 글은 손위에 쓰인 또 다른 글을 글 위에 덮기 시작하였다. 글의 모습이 이상해지자, 글은 불편해하였고, 글은 오기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글의 오기에 글들은 안절부절못하였으며, 폭력에 휩싸여 침묵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글이 목덜미를 잡고 흔들었다. 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었고, 글은 그것에 겁을 먹었다. 글은 무서움을 쓰기로 한다. 글에 숨겨진 화를 쓰기 위해 글뒤에 숨어 글을 조심스레 희미하게 사용하였다. 글이 글에게 대화를 거부하는 것을 글은 알지 못했다. 글의 속마음을 글은 알지 못했다. 강한 압박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글에게 속삭임은 화를 돋우는 것을 알았다. 글은 자연을 보았다. 글은 자신의 글을 소모하며 자연을 향했고, 점차 모습을 잃어간다. 글은 시계방향으로 맴돌았다. 수직으로 소리를 치고, 음악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벙어리 민들레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땅을 쳐다보았다.


글쓰기의 흥미에서 재미로 이어질 때, 펜이 이끄는 곳의 목적지는 닿고 싶었던 내 모습의 경계선이었다. 경계선위를 열심히 더듬으며 한 바퀴 돌고 나니, 다시 원점이다. 남들보다 촘촘히 찍어대었던 경계선을 , 조금 떨어져서 한 번쯤 관찰할 때이다. 펜을 바닥에 떨어뜨린 후, 나는 내 모습을 감상해 본다. 글의 지우개는 지우개가 아니다. 또다시 어떤 경계선을 찾을 것인지, 한쪽 눈을 감고, 관찰자의 눈으로 두드려본다. 그림 속의 수많은 스케치선들이 있음을 글을 쓰며 배운다. 경계선의 한계를 즐겨야 함을 배운다. 뱅글뱅글 돌며, 어지러움을 느껴야 함을 안다. 정체는 구토이며, 글쓰기는 그것의 되새김질이다. 글쓰기의 머뭇거림을 즐긴다. 이 시간의 멈춤을 감사한다. 나는 글을 계속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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