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체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은퇴,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나는 부모님을 이해하고 싶었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노인이 되어가는(그 당시에 아버지는 노인이라고 칭하기에 너무 젊으셨다), 커다란 산이었던 아버지의 어깨가 점점 작아짐을 느끼며 불안이 엄습하던 그 시절... 노인상담사 과정을 이수하겠다고 노인복지관에서 강의를 듣고, 공부를 했다.(되돌아보니 나의 불안에서 시작된 염려가 너무 컸고 그걸 이겨내는 방법이 우습지만 공부였던 것 같다)
함께 수업을 듣는 기수 중에서 내가 제일 막내였다. 이미 은퇴를 하신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고, 나에게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는지 내 옆자리는 늘 비어있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도 내가 잘 섞이지 못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은근히 낯가림이 심했던 탓에 조용히 혼자만 다닌 것도 있겠다.
조금 늦게 도착을 한 날. 부리나케 출석체크를 하고 빈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 선생님이 친절하게 지금 배우고 있는 페이지를 알려주신다. 따스하게 다가와 주시니 경계심이 낮아졌나 보다. 나긋한 목소리에 스스로 벽을 치고 있던 나의 긴장이 살살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날의 인연으로 교육이 마칠 때까지 먼저 온 사람이 자리를 맡아주는 짝꿍이 되었다. 짝꿍 선생님의 따스한 친화력 덕분에 나는 다른 선생님들과도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쉬는 시간 커피를 한잔 하며 담소를 나누던 중 "김 선생은 장금이 같다"라며 이 문구를 보여주신다.
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씨야.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드라마 '대장금'에서 한상궁 마마의 말
나를 보며 이 대사가 떠올랐다고 했다. 늦깎이 대학원생이 기특하셨나 보다. 사실 나는 장금이 같지 않은데, 부끄럽기도 하고, "너무 곱게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얼굴이 빨개졌다.
기대를 받으면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더라. 장금이처럼 쉬지 않고, 모두가 그만둘 때 다시 시작하는 끈기 있는 내가 되려는 노력을 했던 것 같다. 덕분에 논문도 무사히 완성하고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정체되었다.
분출도 해보지 못하고,
머뭇머뭇거리고 있다.
이렇게 쓰는 것이 맞나?
도통 혼란스럽다.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
쓰면 쓸수록 나의 무지함에 직면한다.
그 직면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피해 가고 싶다.
그러니,
발걸음이 더뎌지고 다른 길로 새기 일쑤다.
오랜 기간 무언가 하다 보면 권태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더라... 열정적으로 긴 시간을 유지하기란 무척 힘이 드는 것이 당연지사겠지. 권태로울 만큼 오래 하지도 않았는데 어디서부턴지 꽉 막혀있다.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시큰둥하다.
뭐 그닥, 열심히 읽고 쓴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다.
배움이 즐겁다고 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만 쫒았다. 좋은 성과를 내어야 신이 나고 만족해 왔다.
글쓰기... 좋은 성과를 낼만한 것이 아님에도 뛰어든 게 기특하기도 하다.
자꾸 쓰면 는다는데, 느는 게 맞나?
의구심이 들지만, 얼마 쓰지도 않았다.
지레 지쳐버렸다고 여겼나 보다.
어릴 적부터 늘 호기심에 일을 벌여놓고, 마무리를 잘 짓지 못한다는 질타를 받았다. 시작은 했지만,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내 기억에는...
지적과 질타만 하고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던 어른들.
미숙한 나는 스스로 터득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한 데다 여전히 마무리에 서툴다. 거기에 나만의 기준이 더해지니 마무리가 더뎌질 수밖에 없다. 더뎌지니 지루해지고 지루해지다 포기해 버린다.
포기하고 싶을 때 곁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게 응원해 주는 이가 있다는 건 굉장히 힘이 된다는 걸 경험했다. 글쓰기가 힘겨울 때 함께 글을 쓰는, 내 글을 읽어주는 벗이 있어 이 정체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무언가 막막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할 때 나는 장금이를 떠올린다. 아니, 장금이 같았던 나를 되새긴다.
자기 최면을 걸어본다.
나는 장금이처럼 쉬지 않고 가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나는 다시 시작할 거라고...
곁에서 든든하게 응원해 주는 이들이 있어 오늘도 다시 힘을 내어본다. 함께 걸어가는 길은 조금 천천히 걸어도 잠시 쉬어가도 될 것 같다. 함께라는 것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