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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세곡 Aug 14. 2023

무섭지? 나도 무서워.

20대 초반까지 골목이 많은 다소 후미진 동네에 살았다. 집으로 가려면 좁고 긴 골목을 지나야 만 했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느라 귀가가 늦을 때가 많았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꽤나 외진 곳이어서 혼자서 이 길을 걸을 때면 등골이 오싹해지곤 했다.


  그런데 이 골목길에 들어설 때마다 생각보다 꽤 높은 확률로 일어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다른 사람과 함께 골목길에 들어서게 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골목 안에 우리 집만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대방이 젊은 여성일 때였다.  


  그분이 나보다 몇 발자국 앞서 골목길에 들어서고 내가 그 뒤를 쫓는 모양새가 되었다. 하필 나의 집은 골목 제일 안쪽에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나보다 앞서 가는 여성분이 나를 의식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분명 뒤통수 밖에 안 보이는데 경계하는 눈빛이 보이는 듯했다.


  얼추 3~5미터 정도 떨어져 가고 있으니 내가 상대방이라도 불안했을 것 같다. 이런 분위기 나도 싫고, 괜한 오해도 사고 싶지 않아 과감히 추월을 결심한다.


  쇼트트랙의 민족답게 순간의 스피드로 치고 나간다. 그런데 내가 속도를 내자마자 앞에 가시는 여성분도 함께 속도를 올리더니 절대로 추월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빨리 걷기 시작한다.


  계속 숨만 차고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 박빙의 승부가 펼쳐진다. 이러다 정말 더 크게 오해받겠다 싶어서 내가 그냥 멈춘다.


  근데, 이 여성분도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응?? 아니 왜 멈추시냐고?? 먼저 가시라고요~~)

 

  내가 다시 걸음을 재촉하면 또 도망치듯이 속도를 낸다. 그러면서 힐끔 뒤를 돌아보시더니 더 빨리 걸음을 옮긴다.


  "저기요! 저 동네 주민입니다. 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더 무서워할 것 같아서 참았다.


  결국, 그냥 포기하고 뒤돌아 골목 입구로 걸어 나와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아무도 없을 때 다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이런 일이 있은 뒤, 하나의 습관이 생겼다. 골목길 어귀에서 나보다 앞서서 가는 사람이 있는지, 그 사람이 나와 같은 방향은 아닌지 살펴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나랑 같은 골목길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면 아예 입구 근처에서 조금 서성이다가 그 사람이 사라진 뒤 들어섰다.


  '나는 내 갈길 간다' 하고 싶었지만, 살다 보니 그러지 못하는 상황도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본의 아니게 무서움을 드려서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제야 나도 이야기한다. 사실 그때, 나도 많이 무서웠다. 나의 귀갓길을 늦추는 당신이.




*사진 출처: Photo by Xavi Cabrer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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