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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세곡 Nov 15. 2023

아쉽지 않은 이별도 있음을 배웠다.

100일의 글쓰기 - 70번째

얼굴에 감각이 없다. 누군가 내 눈을 천으로 가린 상태다. 그리고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아~ 입을 크게 벌리세요.’



  나는 지금 치과에 누워있다. 나와 반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랑을 아니, 사랑니를 떠나보내기 위함이다. 마취 주사를 맞았더니 입술과 턱 주변이 얼얼하다. 곧 발치를 시작할 텐데 무척 긴장된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치과 공포증이 심한 편이다. 사랑니는 뿌리가 물렁한 20대 때 빼야 베스트라던데 나는 미루고 미루다 결국 40대가 넘어서 하게 되었다. 나이가 더 들면 덜 무서워질 줄 알았건만, 웬걸 더 무섭다.


  사랑니는 잘 뽑는 치과에서 뽑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었다. 매복 사랑니의 경우 발치를 안 해주는 치과도 있어서 인터넷 검색을 무척 많이 했다. 어떤 사람은 신경을 잘못 건드려서 턱에 감각이 없단다. 어느 누구는 뿌리를 남기고 뽑았는데 그게 잘못 되서 한 번 더 잇몸을 쨌다고 한다.


  왜 이런 후기들만 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숨겨진 사랑니 맛집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기에 이르렀다. 작년에 새로 개업한 치과인데 사랑니 전문 병원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후기가 괜찮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세상 신중한 나는 올 봄부터 이 치과를 더 적극적으로 예의 주시해 왔다. 장장 6개월 동안을 지켜본 결과 새로 업데이트 되는 후기들까지 이상 무였다. 우리 동네 치과 중 이만한 곳은 없을 듯 했다.


  올해 가기 전에 꼭 발치하리라 마음 먹었던 터라 주저 없이 예약을 했고, 지금 이렇게 누워있는 것이다. 드디어 원장쌤이 등판했다. 마취 된 것을 확인하더니 내 눈을 가렸다. 오늘은 왼쪽만 뽑자고 하셨다. 


  내 사랑니는 양쪽 위에 난 것은 똑바로 났는데 아래 난 것이 모두 매복이다. 사랑니 중에서도 극악의 난이도라는 매복 사랑니인 것이다. 너는 무엇이 부끄러워 그렇게 잇몸 속에 숨어 누워서 살아온 것이란 말이냐.


  아무튼 원장쌤은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 말씀하셨다. 각오하라는 말로 들렸다. 발치가 시작되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소리로 그리고 무뎌진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온갖 기구들이 내 입속을 드나들고 있음을. 


  시끄러운 드릴소리가 난다. 턱을 흔들어대는 진동도 느껴진다. 내 몸에 구멍을 뚫고 있나? 중간에 가끔씩 쪼개지는 소리도 곁들여졌다. 이를 뽑는데 왜 공사장에서 나는 소리가 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장쌤 옆에서 간호사쌤은 내 입에 호스를 넣어 바람과 물을 번갈아 가며 뿌려주었다. 중간 중간 입을 벌려라, 다물어라, 헹궈라 내가 행여 의식을 잃었을까 걱정이라도 되는지 운동도 시켜주었다. 나만 가만히 누워있을 뿐, 두 선생님은 내 이빨 하나 뽑겠다고 아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입에 거즈를 잔뜩 넣어주더니 입을 다물란다. 뽑히는 느낌도 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다 끝났단다. 소리와 감각만 조금 불쾌했지 큰 통증 없이 무사히 마친 것이다. 원장님은 아래에 있는 사랑니 뿌리가 좀 휘어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남김없이 잘 뽑았다고 말씀 하셨다. 


  그동안 겁먹고 치과 오기를 미뤄왔던 내 자신이 창피할 만큼, 막상 뽑는 것은 크게 아프지 않았다.  오랜 시간 검증해 온 만큼 이곳은 사랑니 발치 맛집이 맞았다. 주의 사항을 안내받으러 나오는 길에 나는 뽑힌 사랑니와 마주하였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왔었던 너였다. 한 번도 네 모습을 제대로 본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너를 처음 보게 되었다. 피투성이에 산산조각 나버린 너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래도 마취 풀리면 내가 더 아플 예정이니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내는 것으로 하자. 아쉽지 않은 이별도 있음을 너를 통해 배웠다. 




*사진출처: Photo by Diana Polekhin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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