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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세곡 Dec 11. 2023

역체감

100일의 글쓰기 - 97번째

좋은 제품을 사용하다가 상대적으로 덜 좋은 제품을 사용하게 되면 성능의 차이가 확 다가오게 된다. 이럴 때 느껴지는 불편함과 답답함을 역체감이라고 한다. 특히 전자제품 종류에서 이러한 역체감은 두드러진다.


  회사 다닐 때 컴퓨터는 사무실에서 지겹게 사용했다. 때문에 집에서는 컴퓨터를 그다지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언젠가 급한 일로 이메일을 확인해야 해서 집 컴퓨터를 켠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우리 집 컴퓨터가 얼마나 오래된 고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더 정확히는 내가 사용하던 사무실 컴퓨터를 최신 사양으로 업그레이드를 해준 다음부터 그랬다. 전에는 느끼지 못한 성능차이가 확연하게 다가왔고 집의 컴퓨터가 이제는 너무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구입한 지 좀 오래되었기는 했어도 못 쓸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도저히 사용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야말로 역체감을 제대로 느낀 것이다. 더 쾌적한 성능의 사무실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집의 컴퓨터를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차이란,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그 뒤로는 답답해서 집 컴퓨터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단순한 작업이라도 가급적 사무실 컴퓨터로 볼 일을 보고 퇴근했고 집에서는 컴퓨터를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


  사실 우리 집의 컴퓨터는 객관적으로 봐도 오래된 것이기는 했다. 충분히 느릴 수밖에 없는 컴퓨터라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동안 나는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사용해 왔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을 경험하고 나니 마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기라도 한 것처럼, 그 불편함과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전자제품뿐일까? 삶도 그러하다. 더 좋은 것을 맛보게 된다면 그 보다 못한 삶에는 만족할 수 없게 된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그랬다. 글을 한창 쓰다가 쓰지 않은 삶을 살게 될 때, 나는 내 삶이 무척이나 불만족스러웠다. 그게 꼭 글을 안 써서냐고 묻는다면 수치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쓰는 삶은 그렇지 않던 삶보다 압도적으로 좋았던 것이 사실이다.


  40대가 가까워서 취미로 시작한 글쓰기는 내게 상당히 엉뚱한 도전이었다. 그동안 살아왔던 내 일상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어버리는 일종의 무리수였다. 그럼에도 나는 글쓰기에 도전한 것이야말로 내 평생 손에 꼽는 잘한 일들 중 하나라고 믿는다. 이제는 오히려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다. 여전히 한 편의 글을 써 내려가는 과정이 편한 것은 아니지만, 쓰지 않는 삶이 내게는 더 불편하다.


  한계 너머의 삶을 맛보는 기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더 열리게 될 것이다. 당장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 못해도 괜찮다. 더 나은 삶을 맛본 이상, 지금의 삶에 만족할 수만은 없게 될 테니. 결국 긍정적인 변화는 현재의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체험했을 때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삶 속에도 역체감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사진출처: Photo by Lorenzo Herrer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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