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상 수상보다 값진 것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세상에 선을 보인 지 딱 1년이 되었다. 며칠 전 에미상 수상은 말할 것도 없고, 드라마 자체를 워낙 재미있게 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오징어 게임을 봐야 하나 망설였다. 이정재 배우님(이하 이정재 배우)이 주연이기 때문이었다.
이정재 배우를 처음 접한 것은 아주 오래전 드라마인 모래시계였다. 드라마 속에서 그의 역할은 여주인공만을 위한 지고지순한 보디가드. 보는 내내 너무 대사가 없어서 저 배우는 왜 말을 안 하지 의아했었다. 당시 이정재 배우가 연기를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대사를 줄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이후 그의 연기가 차츰 나아졌음에도 주연보다는 조연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래시계가 방영된 지 정확히 4년 후인 1999년에 영화 '태양은 없다'로 청룡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음에도 말이다. 주연 배우는 관객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무언가를 이정재 배우에게서 찾지 못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훌쩍 흘러서야 배우 이정재를 다시 보게 되었다. 2013년 개봉작 영화 '관상'을 관람하고 나서다. 사실 그가 출연하는지 조차 모르고 본 영화였다. 대체 수양대군이 누구야? 하면서 보고 있는데 영화 시작 1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수양대군의 모습을 한 이정재 배우가 등장했다.
그의 얼굴이 화면 가득히 채워지자 쏟아지는 아우라에 소름이 확 돋았다. 얼굴에 난 상처, 야망에 굶주린 그의 살기 어린 눈빛, 한 마리의 이리가 사람으로 환생한 듯한 역적의 상이었다. 이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역대급 등장 씬이 되었다.
영화 '태양은 없다'와 '관상' 사이에도 그가 출연한 영화가 꽤 많은데 이렇다 할 흥행작이 없었다. 배우로서 너무 빨리 성공했던 그는 남들보다 슬럼프도 빨리 맞이하고 말았다. 연기가 한창 물오를 시기인 30대의 대부분을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보낸 것이다.
청춘스타가 성인 연기자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슬럼프는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슬럼프 기간이 거의 10년 가까이 지속된다면 버티기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연기를 포기할 법도 한데, 그는 배우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해냈다.
그런 면에서 오징어 게임 속 주인공 성기훈과 이정재 배우는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서바이벌 게임에서 생존하기 위해 끝까지 버텨낸 성기훈처럼, 배우로서 생존하기 위해 그 역시 오랜 시간을 버텨온 것이다. 오징어 게임으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도 정말 대단하고 축하받을 일이지만, 배우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텨준 그의 여정이 더 값진 것 같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그이지만, 언젠가 다시 슬럼프에 빠지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잘 극복해 낼 것이다. 이제 연기를 넘어 연출에까지 열정을 태우고 있으니,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오래오래 대중 곁에 머물러 줬으면 좋겠다.
연기 인생의 굴곡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 준 배우 이정재는 '진정 왕이 될 상'이다. 오징어 게임 시즌2로도 에미상을 수상하여 반박 불가 연기파 배우로서 왕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다지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