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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지만 향수는 사고 싶어.

by 천세곡

얼마 전부터 향수에 미쳐있다. 이토록 과격한 문장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향수에 푹 빠져 시간을 보낸다. 향수도 나름 사치품이라면 사치품인데, 직업도 없는 내가 갖기에는 솔직히 어울리지 않는 취미다.


향수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생각보다 진지하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향수 한 두병 사고자 이러는 것이 아니다. 향수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다양하고 깊게 알고 싶은 마음이다. 이러다 다음 직업을 조향사 하겠다고 설쳐댈지도 모르겠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 위해 향수 관련 유튜브 영상들을 열심히 본다. 덕분에 유튜브 알고리즘은 온갖 향수에 관련된 것들로 가득하다. 패션향수는 물론이거니와 소위 조딥바(조말론. 딥티크. 바이레도)로 대표되는 프리미엄 니치향수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향수 리뷰 영상들은 죄다 섭렵하고 있다.


덕분에 향수로 유명한 브랜드와 제품명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아직은 향수의 ‘향’자도 모르는 향린이지만, 영상 속에서 조향사들이 향기에 대해 설명해 주면 집중하려고 애쓴다. 내용의 반의 반도 알아듣지 못할 때도 많지만 어떻게든 머릿속에 집어넣어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향수 리뷰 영상을 볼 때마다 솟아나는 구매 욕망을 억누르기란 여간 쉽지 않다. 관심이 가는 제품이 나오면 향이 어떨지 너무 궁금해진다. 영상 속 전문가가 온갖 형용사들을 동원해 화려한 비유의 언변으로 향에 대해 설명을 해주지만 그것만으로 성에 찰리 없다.


다행히 백화점이나 매장을 찾아가면 시향이 가능하다. 몇몇 브랜드는 인터넷으로 시향지나 샘플을 무료 혹은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받아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건 지금 바로 당장 화면 속 저 향수의 향을 맡아보는 것이다.


뚜껑을 열어, 몸에 뿌린 뒤 코를 가져다 대어야만 직성이 풀릴 듯싶다. 눈에만 아른 거리는 반짝이는 향수병 말고, 귓가에만 울리는 향기에 대한 차분한 설명 말고 진짜 코를 찌르는 향기가 필요하다. TV를 통해서 냄새도 전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시각과 청각뿐만 아니라 후각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진짜 스마트한 TV말이다.


시간이 얼마나 더 흘러야 그러한 기능을 가진 TV가 나올 수 있는지, 정말 기술적으로 구현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뼛속까지 문과인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나는 이미 손 쓸 수 없을 만큼, 급성 중증 향수병에 걸려버린 상태라는 것이다.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 비교적 낮은 가격대의 소모품 소비가 늘어난다고 한다. 이를 스몰 럭셔리라고 하는데 높은 금액대의 소비는 포기하고, 손을 뻗으면 그나마 닿을 수 있는 물건들을 구입함으로써 만족감을 누린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그런 상태인 것 같다.


세계적인 장기적인 침체는 스몰 럭셔리 열풍을 낳았다. 유행에는 관심도 없던 내가 생뚱맞게 향수 모으기로 그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고향이 아닌 그 향기를 그리워하는 향수병에 걸린 나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대개의 소비에 관련된 병들이 그러하듯 내가 걸린 향수병 역시 향수를 사면 치료될 듯하다. 내 병은 내가 잘 안다. 약병이 아니라 향수병이 손에 쥐어지는 순간, 금단 현상은 사라지고 심신은 안정감을 누리게 될 것이다.


문제는 돈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백수가 향수라니. 있는 향수를 중고장터에 내어다 팔아도 모자랄 판국에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지만 좋은 걸 어쩌겠는가. 직장은 없어도 좋은 향기에 대한 욕망은 있는 것을.




*사진출처: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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