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예복을 버렸다. 결혼식 때 내가 입었던, 아내가 비싸게 주고 맞춰준 양복을 꺼내어 버렸다. 결혼식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이다. 사이즈가 맞지 않기도 했고, 일상에서 입기에는 너무 화려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입었으니 다가올 미래에도 입지 않을 확률이 99.999...%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꽤 고가의 옷이고 결혼 예복인데 버려도 되는 걸까? 더구나 아내에게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도 되었다. 무척이나 좁은 집에서 사는 우리 부부에게 미니멀 라이프는 선택이 아닌 필수의 영역이다. 집값이 비싼 서울에서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면에서 한껏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미니멀한 삶을 살아가기로 서로 동의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물건을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눈에 띄는 것들 먼저 조금씩 줄여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먼저는 옷이었다. 옷장과 서랍을 열어 입지 않는 옷을 선별해 가기 시작했다.
옷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특별히 옷에 애착을 두는 편이 아님에도 장롱과 서랍 깊숙이 숨어있는 그것들을 꺼내놓기가 쉽지 않았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연 없는 옷도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내 몸에 걸쳤던 옷이라면 어느 순간의 추억을 함께 했던 동지와도 같았다.
그동안 숱하게 마음만 먹고 제대로 버리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밝은 빛을 보게 되면 옷도, 추억도 모두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것만 같아서 녀석들의 존재여부만 확인한 채 다시 방치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미뤄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더 이상 미니멀 라이프를 꿈만 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큰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가진 옷들 중 끝판왕에 손을 대기로. 결혼 예복을 과감히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옷장을 열어제끼고 녀석의 멱살, 아니 옷걸이를 잡아채 꺼내본다.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비싼 놈이다. 이걸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입지 않는 옷들 중 이제 버리지 못할 옷이란 없을 것이다. 아, 막상 버리려니 또 눈앞에 가격표가 아른거린다. 결혼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형편이 안 좋았기에 아내가 정말 큰맘 먹고 맞춰줬는데...
눈을 질끈 감고 아내에게 묻는다.
나 : 나 이거 안 입을 거 같은데 버…. 버려도 될까?
아내 : 안 입을 거면 버려. 뭐 하러 가지고 있어.
나 : ?????
망설임이라고는 1도 없는 그녀. F인 줄 알았는데, T였나? 그래도 혹시나 기분이 상한 게 아닐까 싶어 긴장을 풀지 않고 표정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한다. 표정의 변화 없이 옷 정리에만 몰두 중인 아내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심임을 확신한다.
끝판왕의 거취를 결정하고 나니 옷을 정리하는 속도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두 박스 정도의 분량을 정리한 것 같은데도 아직 한참 남았다. 다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이만하기로 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다시 정리하기로 했다.
그동안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가격과 옷에 깃들어 있는 추억들 때문이었다. 투자한 돈과 체취처럼 물든 마음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서다. 그런데 막상 가장 비싸고 중요한 옷을 처분했음에도 별로 허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겨진 것들에 더 마음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입은 옷, 오늘 함께 하는 사람과의 시간에 더욱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추억은 밤하늘의 별처럼 저 멀리서 빛나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 또 하나의 빛나는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것이다.
*사진출처: Photo by Lawrence Suzar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