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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해도 아이템은 포기 못해.

by 천세곡

장비에 관심이 많다. 유비, 관우, 장비할 때 장비 말고,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기구나 기계 같은 것들 말이다. 소위 아이템이라고 하는 장비는 일상의 넓은 영역에서 매우 값진 활약을 해준다.


특히, 하기 싫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일수록 어떤 장비를 사용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한마디로 템빨이 필요하다. 괜찮은 아이템을 이용하면 수고를 꽤나 덜 수 있다. 각종 기기들이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일 것이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내가 가장 만족했던 장비는 키보드였다. 지금은 작은 방구석에 모셔져 있지만 말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고가의 키보드나 마우스를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회사에서 지급해 주는 저렴한 키보드와 마우스도 그럭저럭 쓸만했다.


그러던 내가 마음을 바꿔먹게 된 가장 결정적 이유는 ‘타건감’에 눈을 뜨면서부터다. 키보드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건 직접 손으로 눌러보면서 체험해 봐야 알 수 있는 영역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손끝을 가져다 대면 느껴지는 묘한 감촉, 힘을 주어 누를 때 전해지는 반발력, 귓가에 전해지는 몽글몽글한 소리까지. 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할 때도 그랬지만 집에서 그 키보드로 글을 써보니 더욱 좋았다. 내가 써 내려가는 글자 하나하나에 감성이 더해지는 기분이랄까? 물론, 남들은 알지 못하고 나만 안다는 게 함정이기는 하지만.


키보드 말고, 하나 더 구매를 하고 싶어서 고민했던 노동템이 있었다. 바로, 팔토시다. 그래, 맞다. 과거 뉴스 자료화면에서 볼 수 있는 그것. 관공서나 사기업에서 주판과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들이 팔에 차고 있던 그 토시 맞다.


사무실이 냉난방이 잘 되는 편이기는 했지만,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쉽지 않았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은 몇 년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된다. 이 날씨에 밖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생각해 보면 할 소리는 아니다.


그래도 이기적인 나 새X는 머리 위에서 지금 당장 쏟아지는 에어컨 바람에 원망이 앞섰다. 반팔만 입으면 팔뚝이 시렸다. 한 여름에도 바람막이나 카디건 같은 아우터를 걸치고 일해야 했다.


그런 류의 옷들을 걸치고 일하는 게 편할리 없다. 팔이 영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은근히 소매에 때도 많이 탔다. 세탁소에 자주 맡기는 것도 일이었던 터라 은근히 귀찮았다. 그래서 팔토시를 생각해 낸 것이다.


적당히 보온도 해주면서, 옷이 오염되는 것도 막아주니 일석이조였다. 게다가 우리 회사의 윗분들은 나이스한 꼰대들이셨다. 나이스한 꼰대란 겉으론 세상 착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꼰대력으로 가득 찬 사람을 뜻한다. 그런 상사들의 눈에도 열심히 일하는 직원으로 보일 수 있는 시각적 효과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아무리 검색을 하고 또 해봐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팔토시는 참 많았지만, 디자인이 너무 촌스러워 옛날 뉴스 자료화면 속에 나오는 그것과 같았다. 아무리 기능에 몰빵한 노동템이라지만, 디자인도 포기할 수 없는 나로서는 절망스러웠다.


결국, 마음에 드는 팔토시는 사지 못했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퇴사를 먼저 하게 되어 더 이상의 어떤 노동템도 당분간은 필요치 않게 되었다. 지금은 팔토시를 사기는커녕 내가 만들어서 팔아야 할 판이다.


오랜만에 방구석에 박혀 먼지가 쌓여가던 고오급 키보드를 꺼냈다. 노트북에 연결해 지금 이 글을 썼다. 팔토시까지 있다면 왠지 글이 더 잘 써지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팔뚝이 제법 허전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아내 몰래 쿠팡 어플을 켜고 팔토시를 검색해 본다.




*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 검색 "KCM 팔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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