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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느리게

by 천세곡

매일 아침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청소기를 돌리는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은 미룰수록 더 하기 싫어지기 때문에 잠이 덜 깬 비몽사몽간에 하는 게 최고다. 그리고 바로 요가 매트를 깔고, 운동복을 입는다.


운동 기록을 남기기 위해 스마트 워치를 찬다. 시트러스 오렌지 향의 천연 아로마 오일을 양쪽 팔목에 바르고 매트 위에 앉았다. 팔목을 코에 가져다 대고 세 번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유튜브로 요가 영상을 틀어놓고 따라 하기 시작한다.


요가 영상도 종류가 꽤나 많은데 어떤 걸 할지는 내 마음이다. 그날그날 꽂히는 영상을 재생한다. 단, 절대 30분을 넘기지 않으려 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자신과의 치열한 다툼 끝에 이른 합의점이다.


아직은 내가 꾸준히 할 수 있는 최대치라 여기고 있다. 물론, 전에 요가원에 다닐 때는 꼼짝없이 한 시간을 채워야 했다. 지금도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보나 마나 다음 날 하기 싫어질 게 뻔하다.


나는 나를 안다. 1시간씩 하면 절대 매일 할 수 없다. 1시간씩 일주일에 두세 번 할 바엔 30분씩 주 5일을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아마도 30분 요가가 시시해지기 전까지는 이 루틴을 쭉 이어갈 듯하다.


요가를 시작한 지 n년 차이지만, 아직도 요가 초보에 머물러 있다. 물론, 중간에 아예 요가를 하지 않고 보낸 시간도 꽤 된다. 그렇기에 더더욱 한 번에 하는 시간보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하는 것에 초점을 두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헤비급 복싱의 전설 타이슨 선수는 이런 말을 남겼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링 위에서 처맞기 전까지는.


퇴사를 한 지 1년 반이 막 지났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퇴사 후의 계획을 그럴싸하게 세웠었다. 오전에는 매일 요가를 오후에는 독서와 글쓰기를 저녁에는 산책과 명상을 하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겠노라고 말이다.


막상 퇴사를 하자 며칠 못 가고 그 계획들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링 위에 오르자마자 KO를 당한 것이다. 스스로를 많이 자책했다. 이 정도도 못 지키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그때만 해도 나를 잘 몰랐다. 객관화가 되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럴싸한 계획을 세울 줄만 알았지, 지켜낼 만한 에너지는 갖고 있지 않았다. 10년 가까이 한 직장에서 시달리다 나왔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충분한 쉼이 더 필요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죄책감을 덜어내고 애쓰지 않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하루를 잉여롭게 보내기 위한 노력 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세 달이 지나고 나니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주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두 번 실패할 수는 없었기에 문턱을 낮추기로 했다. 열심히 살기 위해 버둥대는 계획이 아니라 아주 쉽게 해낼 수 있는 목표를 세워갔다.


나의 아침 청소와 요가 30분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처음에는 이 두 가지만 했다. 차차 적응이 되면 그 위에 하나씩 계획을 얹어갔다. 작은 계획들을 하나씩 쌓아갔다. 어느새 돌아보니 거의 매일 글을 쓰고 책도 읽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익숙해지면 슬로우 조깅을 추가해 볼 생각이다. 원래는 그냥 러닝을 하려 했지만, 지금 나의 체력으로는 보나 마나 실패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 나에게는 실패보다 포기가 데미지가 적다.


산책이나 해야 되나 고민하던 중 우연히 슬로우 조깅에 대해 알게 된 건 행운이다. 슬로우 조깅은 말 그대로 천천히 뛰는 저강도 운동을 말한다. 뛰는 것과 걷는 것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그렇다고 빨리 걷는 경보는 아니다. 보폭을 좁게 하고 거의 걷는 속도에 가깝게 천천히 뛰는 것이 포인트다. 속도는 걷기, 자세는 뛰기다. 옆 사람과 대화하기에 무리 없을 정도로 뛰듯이 걸으면 된단다.


관절에 부담이 가지 않아 부상의 위험도 거의 없다. 남녀노소 누구나 아무리 운동 초보자라 해도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그렇다. 지금의 나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운동은 없다.


이마저도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슬로우 조깅까지 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건강해질 거라 믿는다. 최소한의 계획만 가지고 매일 삶의 링 위에 오른다. 소위 갓생을 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하루 일과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다.


분명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나아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일상 자체가 슬로우 조깅과 닮아있다. 걷는 속도로 뛴다.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느리게 살아가고 있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Tab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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