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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췄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는 이유

by 천세곡

글을 쓰는 게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며칠 동안 글쓰기를 포기해 버렸다. 애써 노트북을 구석에 박아둔 채 외면했다. 불과 며칠 쓰지 않은 게 대수냐 할 수 있다. 매일 뭐라도 몇 글자 쓰는 게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었던 나에게는 꽤 가혹한 일이었다.


주로 일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걸 쓰는 편이다. 인상적이라 함은 찰나에 스치는 영감만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아주 특별하게 번뜩이는 소재가 별똥별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면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늘이 내려주는 글감을 가지고 곧바로 글을 뚝딱 써내는 일은 거의 없다.


번뜩이는 글감이 별 노력 없이 복권처럼 주어질 때가 있기는 하다. 그런 행운은 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뿐이다. 말 그대로 운수 좋은 날. 사실상 내가 쓰는 대부분의 모든 글들은 꽤 긴 시간 동안 마음속에 단어나 문장들을 쌓아둔 덕분이고 어느 임계점에 다다라서야 써지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덧 하나의 실로 연결될 때가 온다. 말이 일정 시간이지 편차는 꽤 크다. 짧게는 한두 시간, 길게는 며칠 동안 그 시간들이 이어진다. 한 마디로 내 안에 가득 차고 넘쳐야 글이 써지는 것이다.


마치 그렇게 토해내듯 글을 써낸다. 별 것 아닌 나의 문장들은 보기보다 인고의 시간 끝에 나오는 게 대부분이다. 쓰는 시간보다 가슴속에 담아두고 생각하는 시간이 갑절은 더 많은 셈이다.


보통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써내면 내 안에서 깨끗이 소화되어 버린다. 분량 조절 실패가 아닌 이상에야 내 글은 늘 한편에 그친다. 아직까지는 이 정도가 나의 실력이고 역량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비슷한 이야기를 연 이어 쓰는 법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변화가 찾아와 버렸다. 작년 12월 3일 계엄 내란 사태 이후, 내가 쓴 글들의 거의 대부분이 현 시국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속보가 뜨고 매일 아침 새롭게 내란과 관련된 뉴스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니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내 안은 비슷한 결의 글감들로만 채워졌다.


하루하루가 다른 날임에도 매일이 윤석렬 대통령과 관련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작정하고 다른 소재를 억지로 끌어와 문장을 시작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뭘 쓰든 결론은 윤석렬과 패거리(혹은 일당들)들이 저지른 잔인하고 뻔뻔한 짓들로 흘러가곤 했다.


더구나 사건의 해결이 한동안 지지부진 늘어지니 그것들을 향한 분노까지 더해졌다. 점점 날 서고 격한 문체의 글자들만 튀어나왔다. 내 안을 가득 채운 건 오직 내란 수괴 윤석열뿐이었다.


마음속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것 외에는 도통 보이질 않았다. 이 정도면 쓸 만큼 썼다고 생각해도 여전히 마르지 않는 샘처럼 그가 벌인 일들이 가슴속에 새롭게 샘솟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것들을 토해내듯 써도 써도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의 괴로움에 나는 점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부터 글을 쓰는 게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대충 휘갈기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어찌 되었든 쓰려면 깊게 들여다봐야만 했고 찾아 꺼내 써야 했으니까. 이런 과정이 반복될수록 내상은 깊어졌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잠시 쓰는 것을 멈춰보았다. 최근 몇 년간 쓰지 않았던 날은 길어야 2~3일 정도였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 동안 쓰지 않으면서 보냈다. 나 자신에 더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때로는 나의 감정과 글을 분리해 볼 필요도 있겠다 싶다. 개인적인 감정과 느낌에 충실한 글도 좋으나 너무 매몰되지 않도록 한 발자국 물러나 덤덤하게 쓰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기회에 진짜 기자라도 된 것처럼 써 봐야겠다.


평소 예민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편인지라 이마저도 쉽지는 않을게 뻔하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글쓰기를 계속해서 고통의 영역에 두고 싶지 않다. 고뇌는 하되, 고통받기는 거부하는 글을 쓰고 싶다.


지금 우리를 덮고 있는 불안과 불의가 그리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듯하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마땅한 처벌이 모두 이뤄진다고 해도, 우리 사회가 받은 상처를 회복하려면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한 자락 희망을 담아내 보겠다고 다시 용기를 내어 이렇게 쓰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다.


희망은 유형의 것이 아니니 물리적으로 손을 내밀어 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잡을 수는 없어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믿는다. 가장 깜깜한 어둠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지금, 반짝이는 별을 찾기 위해 열심히 하늘을 올려다보아야겠다. 별을 찾아 올려다보는 일이 나에게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이다. 희망을 찾기 위해 쓴다. 어딘가에 빛나고 있을 정의라는 별을 찾기 위해 써본다.





*사진출처: Photo by Brina Blu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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