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라면 담을 쌓고 사는 편이다. 당연히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주 일관되게 열심히 공부를 안 했다. 열 번 혼나면 아마 아홉 번은 공부 때문에 혼이 났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는 채점한 시험지를 집으로 가져가서 결재서류 마냥 부모님 싸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선생님께 다시 제출하는 것이 일종의 룰이었다. 당연히 공부를 못했던 나에게 성적이 나오는 날은 항상 매를 맞는 날이었다. 집에 가기가 무척 싫었다.
초등학교 2학년 교실, 선생님께서 채점된 시험지를 나눠주시던 날. 내 이름이 불렸고 앞으로 나가 시험지를 받았다. 주룩주룩 빨간 비가 내리고 있다. 자리로 돌아와 틀린 개수를 세어봤다. 정확히 스물아홉 개였다.
총 몇 과목에 몇 문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마무시하게 못 본 것은 확실하다. 어린 마음에 내가 생각해도 참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이걸 어떻게 보여드려야 하지 걱정이 되었다. 혼날 생각에 눈앞이 벌써 캄캄하다.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몰래 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놈의 싸인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야속하게도 이런 날은 수업이 빨리 끝나 벌써 종례시간이다. 알림장을 적고 받은 시험지도 함께 접어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아버지께서 늦게 오시기라도 한다면 좋으련만. 이런 날은 희한하게 일찍 집에 오셨다. 노점상을 하셔서 장사가 좀 안 되면 일찍 접고 들어오시곤 했기 때문이다. 하필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아홉 살 인생의 최대 난제 앞에 선 순간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아버지께서 집에 들어오셨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단 하나다. 고통의 시간을 최대한 줄여보는 것이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몇 번의 시험을 치르다 보니 이것도 나름의 경험이라고 노하우가 생겼다. 그래봤자 아홉 살 꼬꼬마지만, 아무리 어려도 인간의 생존 본능은 강하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맞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아버지께서 계신 방으로 입장함과 동시에 최대한 표정에 신경을 썼다. 대역죄인이라는 말도 모를 때였지만, 세상 죽을죄를 다 지은 얼굴을 하고 고개부터 푹 숙였다. 시험지를 꺼내며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기 시작했다. 한대라도 덜 맞을 수 있다면야 아역 탤런트 뺨치는 메쏘드 연기는 나도 할 수 있지 싶었다.
아버지의 손을 보니 몽둥이가 들려있다. 당시 빨래 방망이로 쓰던 나무 막대기였다. 나를 혼낼 때 두드리는 건 봤지만 솔직히 빨래를 두드리는 걸 본 기억은 없다. 처음부터 빨래용으로 쓸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가 제일 중요하다. 강도를 낮추는 것이 관건이다. 몸에 힘을 주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힘을 살짝 빼면서 날아오는 궤적을 잘 파악해야 한다. 리듬을 타듯이 몸을 최대한 스무스하게 움직여 본다.
오른쪽에서 날아오면 왼쪽으로, 왼쪽에서 날아오면 오른쪽으로. 나를 가격하려는 찰나 자연스럽게 몸을 몽둥이의 진행방향 쪽으로 살짝 움직여 준다. 운 좋게 타이밍 잘 맞추면 충격을 최대 20%까지는 줄일 수 있었다. 문제 잘 맞히는 요령을 터득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매를 잘 맞는 스킬만 늘어갔다.
체벌이 금지된 시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80~90년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당시는 가정과 학교에서 체벌하는 것이 금지는커녕 당연시되었다는 것을.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거의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체벌이 잘못된 것임을 때리는 부모도 매를 맞는 자녀도 대부분이 알지 못했다.
나 역시, 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아홉 살 풋풋한 나이에 덜 아프게 맞는 요령이나 터득하는 것이 얼마나 웃픈 일인지를 말이다. 어릴 때였으니 맞으면 맞을수록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멀어진 것도 사실이다. 내 몸집이 아버지만큼 커지고 나서야 맞는 일은 사라졌다. 세상도 변해 그 유명한 말처럼, 꽃으로도 때려서는 안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아버지는 항상 ‘공부 잘하라고 하는 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이야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그 의지를 내게 관철시키는 방편으로 매를 드셨다. 당시 시대의 분위기가 그러했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으니 사랑해서 매를 든 것이라고 믿고 싶다.
허나 매 타작 이후로도 나는 계속해서 공부를 못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내가 열심히 안 해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것임을 안다. 하지만 꼭 체벌을 통해서 훈육을 하셨어야 했나 하는 원망도 지울 수가 없다. 나에게 있어서 체벌은 더 열심히 하도록 만들어주는 긍정적인 동기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때리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나를 가르쳐 주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자꾸만 그때의 기억이 나는 이유는 아버지가 든 매가 사랑의 매일 지는 몰라도 나를 자라게 하는 성장의 매는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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