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인 그녀 리뷰
가끔 과거로 돌아가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만나서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1년작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개봉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추억의 파란 화면 PC통신에서 연재 중이던 웹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차태현(이하 견우), 전지현(이하 그녀)이라는 두 배우를 차세대 스타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몇몇 장면들은 당시 젊은 커플들이 실제로 따라 하면서 대유행을 했고, 또 어떤 장면은 지금까지도 각종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심심치 않게 패러디되곤 한다.
한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이 영화 안에는 '미래인'이라는 설정이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지구에는 미래에서 온 사람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유치한 영화 각본을 써서 견우에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 이야기의 주인공도 늘 미래에서 온 사람이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이 설정은 더욱 두드러진다. 견우와 그녀가 이별한 뒤, 뒤늦게 캡슐 속 편지를 꺼내 보러 간 여주인공. 나무 아래 쉬고 있는 한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 할아버지는 다름 아닌 미래에서 온 노인 견우였다. 할아버지가 하는 대사를 유심히 들어보면 이미 아래 묻어둔 편지를 다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의 편지를 우연히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견우이기에 젊은 날 읽어보았다는 뜻이 된다.
뿐만 아니라 둘의 대화가 끝난 후, 그녀가 언덕을 내려가려 하는 장면에서 하늘 높이 UFO가 솟구쳐 날아가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로맨스물에 무슨 일인가 싶기는 하지만, 정말 그렇다. 워낙 찰나의 장면이라 개봉 당시 이 부분을 놓친 관객들이 많았다. 나중에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장면을 관객이 알아보고 말고는 관객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도록 열어둔 설정이라고 말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미래에서 온 노인 견우가 실은 둘의 만남이 시작될 때부터 그들 곁에 있었다는 점이다. 워낙 유명한, 지하철 안에서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 속에 노인 견우가 승객으로 앉아 있었다. 이 역시 스쳐 지나가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마치 우리 현실 속에 미래인이 실제로 와 있다고 하더라도,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미래인 견우는 현재의 견우와 그녀를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지만 둘을 이어 주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이들의 만남이 더 쉽게 혹은 극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나서지 않는다. 편지를 읽기 위해 올라온 그녀의 질문에 답해주고, 나무를 자세히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자의 역할만 해줄 뿐이었다. 마치 오작교를 놓아주던 까치와 까마귀처럼 말이다.
미래에서 온 견우가 현재에 와 있는 이유는 자신이 젊은 날에 했던 어떠한 선택을 후회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선택 이전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해서가 아니었을까.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현재를 사는 나에게 달려 있음을 알려주고 싶어서인 듯싶다.
오늘도 과거로 돌아가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미래에서 건너간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나면 나는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을까? 과거의 내가 어떠한 삶을 살기를 바랄까? 아마도 나 역시 과거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주어진 현실 앞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응원하며 지켜보게 될 것 같다.
미래에서 온 내가 지금의 나에게 바라는 것 역시 그것이지 않을까.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영화 속 주인공 같은 반짝이는 삶일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에서 온 할아버지 견우가 그녀에게 했던 대사는 정말이지 최고의 명대사가 아닐 수 없다.
- ‘운명이란 말이야 노력하는 사람한테는 우연이란 다리를 놓아주는 거야.’
*사진출처: 영화 "엽기적인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