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부서 내에 근무하며 정직원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겉으로는 티가 하나도 안 나는 협력업체 소속>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며칠 후 회사를 찾아가 하루 만에 3차 면접까지 본 후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담임선생님께 알리고 다음 날부터 나는 교복 입고 출근하는 실습생이 되었다.
회사 생활은 비교적 쉬웠다.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되니 손 빠르고 눈치 빠른 나는 항상 칭찬을 들었다.
이 주일쯤 지나 부장님이 교복 입은 여학생과 들어오며 소개했다. 나와 같은 학년이고 다른 학교지만, 그 아이는 정직원이라고 했다.
누군가 그 아이는 낙하산이라고 말했다. 같은 사무실에 두 여직원이 다른 조건으로 근무하는 씁쓸한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월급을 받은 날 생각보다 많은 금액에 놀랐다.
먼저 취직된 친구들의 월급보다 높았다. 수습 기간이 끝나면 조금 더 올라간다고 했다.
첫 월급은 부모님 내복을 꼭 사드려야 한다는 말을 익히 알고 있었다.
엄마는 연한 분홍색 내복을, 외할머니는 베이지색 내복과 신권이 든 봉투를 준비했다.
“아이고 콩만 하던 우리 헌아가 언제 이리 컸누. 할매가 헌아한테 용돈을 다 받아보고. 이제 아가씨가 다 됐네.”
외할머니는 놀란 눈으로 봉투를 받더니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시늉을 했다. 이제 정말 어른이 된 것 같아 날아갈 듯 기쁘고 뿌듯했다.
필요한 것을 내 돈으로 사는 것이 신기했다.
퇴근 때 동생한테 전화해 먹고 싶은 것을 물어 사가면 방방 뛰며 좋아했다.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수능 시험일이 다가오자,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학교는 돈을 내고 다녀야 하고, 회사는 돈을 받고 다닌다.’
월급의 단맛을 본 나는 수능을 포기하고 말았다.
입사한 지 1년이 되어갈 때쯤 IMF로 큰 혼란에 빠졌다.
그즈음 전화교환실에 근무하던 직원 한 명이 퇴사했는데, 그 자리를 내가 채우게 되었다. 1년 뒤 더 이상 충원 없이 혼자 근무하게 되었다.
네 평 남짓한 공간에서 혼자 근무하니, 외할머니한테 전화하기가 쉬워서 좋았다.
매일 12시에 어김없이 전화했다.
사소한 것부터 이상했던 일, 화나는 일, 웃겼던 일, 매일 똑같이 일어나는 일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외할머니는 예전처럼 12시 내 전화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신호가 한번 울리면 받았기 때문이다. 동네 할머니들이 놀러 와 있어도 내 전화를 빠르게 받았다. ‘우리 외손녀 전화’라고 자랑하는 게 들렸다.
외할머니는 다시 하루하루가 기다림으로 들떠있었고, 나도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역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