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후 엄마와 전학할 학교에 갔다. 다섯 번째 전학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시골 학교보다 많은 학생들과 교실의 성숙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다.
“너 성적이 우수수수수라며?”
첫날부터 따라붙는 말에 머리가 띵했다. 시골에서는 수업 시간에 열심히만 하면 시험 점수받기는 쉬웠다.
하지만, 전학 첫날부터의 수업은 몇 단계나 높은 듯 따라가기 어려웠다.
첫 시험 성적은 참담했다. 경계하던 시선들이 코웃음으로 바뀌자, 숨이 막혔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를 반갑게 기다리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달래주던 목소리는, 낯선 세계의 두려움을 나무 그늘처럼 감싸주었다.
우리는 얼굴을 보듯 전화로 만났다. 외할머니는 하루 종일 내 전화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도 얼른 받았고, ‘여보세요’가 아닌 ‘헌아가?’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짧은 통화지만 전화를 끊을 때면 늘 아쉬웠다. 서로 먼저 끊으라며 기다려 줬다. 외할머니를 집에 두고 오는 그날의 따끔거리는 기억처럼 전화를 끊을 때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 할매 보고 싶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수 없이 되뇌었다.
중학교 3년 내내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시달렸다. 시험 때만 되면 증상이 심해져, 고입 시험을 칠 수 없었다.
내신성적으로 들어간 학교는 내 인생 최고의 학교였다.
학교를 둘러싼 벚꽃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만발했다. 눈부시게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평생 할 꽃구경을 학교에서 다했다. 행복에 젖어 입꼬리는 올라가고 얼굴은 예뻐졌다.
벚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원두막에 앉아 책을 읽고, 친구들과 깔깔 웃으며 장난을 치며, 선생님과 예쁜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도 주어졌다.
교장선생님은 시인이었고, 국어 선생님은 아동문학가였다. 덕분에 시 낭송대회, 독후감 발표 대회, 각종 글짓기 대회가 열렸고, 나는 문학소녀가 되어 작가의 꿈을 꾸기도 했다.
국어 선생님은 동화는 어린이들만 읽는 것이 아니라며, 수업 시작 전 항상 짧은 동화를 읽어주고 느낌을 발표하게 했었다. 처음엔 쑥스럽고 어색했지만, 선생님의 노력은 우리를 자유롭게 발표하는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학교생활은 내 불안감을 치유해 주고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말랑한 새순은 나무가 가르쳐 준 대로 서서히 단단한 가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오랜만에 본 내 얼굴에서 전에 없던 생기가 돈다며 반가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