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위로

고단했던 시간도 지나고 나면, 결국은 삶의 한 문장이 된다.

by 김현정

자기 추워진 날씨에 겨울옷을 꺼내야 하나, 아직 가을옷으로 버텨볼까 망설인다.
여름옷도 정리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 같다.


쌀쌀한 바람에 따뜻한 옷을 챙겨 입고, 발목에는 보호대를 감았다.

그런데도 아직 걷기엔 무리인지 발목이 시큰거린다.
그래도 이 정도라 다행이다. 발목을 다친 지 일주일 만에 병원 예약이 잡혀 있으니,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부터 서둘러 아이와 서울대병원 정기검진을 다녀왔다.
절뚝이며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 도착한 병원은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사람들로 북적였다.


스무 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어린이병원에 다니다 보니
진료 대기실엔 아주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연령이 섞여 있다.
작은 아기를 품에 안고 안절부절못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그때의 기억이 스쳤다.


심장 수술을 하고 자가호흡이 어려워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던 시절.
입에 거즈를 물고 약물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버티던 아이의 얼굴은
숨결 하나하나가 기적 같던 시간이었다.


그때는 중환자실 밖에 보호자 대기실도 없었다.
의자 몇 개를 붙여 놓고, 박스를 깔아 바닥에 누워 있다가
“위독합니다”라는 전화가 오면 곧바로 달려가야 했다.
아이를 잃는 부모의 울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그런 전쟁 같은 날들을 지나, 오늘 나는 방문자로 병원에 왔다.
너무 익숙해서 고향 같기도 하고, 너무 멀어서 꿈 같기도 하다.
이 모든 일이 정말 우리에게 있었던 일인지, 가끔은 믿기지 않는다.


20년 가까이 우리 아이를 진료해온 의사 선생님은 5분 남짓 얼굴을 비추지만,

“이상 없습니다.” 그 한마디가 여전히 담담한 위로가 된다.


검진을 마치면 아이와 늘 하는 의식이 있다. 금식을 끝내고 병원 밖에서 밥을 먹는 일이다.
“오늘은 뭐 먹을까?” 묻자 아이는 어김없이 예전에 먹었던 메뉴를 떠올린다.
“나는 순대국 먹고 싶은데, 환이는?” 하자 아이도 똑같이 순대국을 먹겠단다.


이제 청년이 되어 순대국 한 그릇을 너끈히 비우는 아이를 보며
시큰거리는 발목도, 지난한 세월도 이상하게 위로를 받는다.


가끔 생각한다.
누군가 내 미래를 미리 보여줬더라면,
나는 이 길을 끝까지 걸어올 수 있었을까.
그땐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이 아픈 시간이 빨리 지나가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미래를 몰랐기에 오늘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늘도 어디선가 아픈 아이를 돌보며 버티고 있을 많은 엄마들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와 응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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