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드 입은 코끼리 Oct 14. 2024

죽음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삶의 불꽃이 꺼지는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가족의 품속으로 돌아가지도 못한다. 생명의 반대말이 죽음이다. 죽음은 어려운 존재가 아니다. 그저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본다면 말이다. 죽음은 언제나 옆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다가왔을 때 죽음의 허망함이 크게 다가올 것이다. 죽음은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은 행위냐고 묻는다면 아닌 것 같다. 총과 칼을 들이댔을 때 맞이하는 찰나의 순간이 죽음이라고 묻는다면 그것도 죽음이 아닌 것 같다. 죽음은 내 몸속의 모든 유기체랑 다 같이 멀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내면이 몸으로부터 분리가 되는 찰나부터 죽음이라고 명할 수 있겠다. 


 오늘이 될 수도 있지만 먼 훗날이 될 수도 있다. 착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이 멀리 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는데 그렇게 말하다가 큰 코 다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매일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죽음은 언제나 곁에 있음을 인지하면서 하루를 보내야 하는가?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일상과 같다고 보아야 하는가? 수많은 질문들을 낳는다. 그중에서 나는 죽음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인가?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어보고자 한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보게 되면 처참하기 이로 말할 수 없다. 피로 뒤범벅되어 있을 수도 있다. 순간적으로 심장마비로 인한 급작스러운 표정과 호흡과 맞이할 수도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된 것 마냥 죽음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예술이 아닌 절망 그 자체다. 절망을 계속해서 맞이하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의사들은 그래서 심각한 죽음을 보지 않는 이상, 크게 감정이 요동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럼 의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 중 하나인 것일까? 나도 의사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다. 그들의 감정선이 일반인과 닮아있지는 않는 것은 틀림없다. 의사는 죽음의 중간지점에 많이 서 보았기 때문에 죽음에 많이 무뎌지고 두려워하지 않는 편이다. 의사 정도 되어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모두가 겪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은 어떤 존재인지 자세히 모른다. 그래도 다시 물어보겠다. 죽음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인가? 나는 그렇다고 말해야 할 수밖에 없겠다.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한다 한들, 사체의 결과물은 처참하고 더 이상 내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대처럼 느껴진다. 


나는 다른 철학자들처럼 죽음은 자연스러운 상태로 인지하거나 우호적으로 보고 싶다. 이데아가 있기 때문에, 죽음을 연장선으로 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니체처럼 긍정적이게 살아야 하는 방향성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나는 에피쿠로스의 주장대로 죽음을 고통도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의이다. 죽음은 한순간이고 또 영원성을 가지고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죽음은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는 한 발 나아가서 주장을 덧붙여보겠다. 죽음과의 영원성에 대해서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오른 사람들의 경우, 삶을 풍족하게 생각하되 죽음 역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는 자세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친구같이 여겨져야 할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올 때도 있지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친구 같은 존재를 말한다. 항상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곁에서 지켜주는 것과 같은 것이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호적으로 우리는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옆에 있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