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드 입은 코끼리 Oct 20. 2024

내가 직장을 좋아했더라면

수필:직장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항상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는데, 그때부터 우리는 가끔씩 사회의 취업문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당시엔 먼 미래처럼 느껴졌지만, 내 친구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곧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야 하는 사회로 접어들 것이니 우리는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며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두 친구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고, 모래 바닥을 쓸며 걸어 다녔다. 그들의 대화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어휘들로 가득 차 있어서 내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직장에 대한 걱정을 했고, 결국 우리는 나이가 29살이 되었다.


29살이 되니 직장을 몇 번 경험해 본 나이가 되었다. 이직한 사람들도 있고, 최근에서야 안정감을 찾고 직장 생활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이었지만, 사회가 우리의 노고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계약직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노동을 돈으로 평가하고, 평가절하하다니... 정말 못돼 먹은 사회라고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직장들 중 내가 좋아했던 곳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직장이 너무 멀어서 그 점이 싫었다. 직장이 멀다는 것보다는, 그 먼 거리를 전철로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상황들, 빽빽한 사람들의 냄새와 자켓들, 그들 또한 쳇바퀴를 굴리듯 출근하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나는 그 사람들 중 몇몇의 얼굴을 기억한다. 이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는 3호선 아가씨, 항상 구석에 앉아 휴대폰을 보는 척하지만 사람들을 힐끔거리는 아저씨, 그리고 대충 가발을 묶고 나와 옆으로 휘어진 머리를 한 40대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커다란 백팩을 메고 다녔다. 순전히 거대한 스탠리 컵을 새척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매일 들고 다니는 습관이 들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니 몇몇의 눈동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눈동자들은 오로지 휴대폰에 집중해 있었고, 피곤함이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여름의 쩌든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독서를 하지 않게 되었다. 독서는 사치였고, 나에게는 그런 사치를 허용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런 여유가 없을 때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었다.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살아가는 좀비 같은 회사 속에 들어가면, 겉보기엔 화창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었다. 위계를 절대 어겨서는 안 되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주 인사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그렇게 사회화 과정을 겪으며 시간이 지나자, 점점 6시 퇴근 시간에만 신경 쓰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그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만약 내가 그 위계질서를 좋아했더라면 어땠을까? 사람들과 함께 점심시간의 가십을 즐겼다면 어땠을까? 사색을 멈추고, 그저 흘러가는 인간 군상 속에서 나 역시 평범하게 살았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하던 취업에 성공해 돈을 벌고, 언젠가 집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회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회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회사를 너무나 싫어한 나머지, 가면 구역질까지 나는 지경이었다. 그 구역질 때문에 회사를 다닐 수 없었고, 나는 예민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하하. 어쩌면 좋을까. 나는 인간 사회에서도 단단한 플레이토 같은 사람이 아니라, 액체 같은 사람이었다. 흘러내리기만 할 줄 아는 사람, 익숙해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회사를 사랑했더라면 나도 단단하고 끈기 있는 고무찰흙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 그런 단단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내 마음속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회사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고등학교 때 친구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어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물 같은 인간이라 회사를 다니는 것이 맞지 않을 것이라며, 더 근면하고 성실한 일을 찾아 나섰어야 했다고 말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나는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들렸던 친구들의 말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코끼리야, 너는 어떤 꿈을 가지고 있어?"







매거진의 이전글 버찌의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