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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드 입은 코끼리 3시간전

풍삭함(풍유+삭막)

수필: 지금 현재 처한 자리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단어, 나의 깊은 철학


내가 생각하는 철학은 "풍삭"에서 온다고 생각해서 쓴 철학적 기교. 그 철학을 완성시키려면 더더욱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철학완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써보게 되었습니다. 


이 어떻게 진행되든지 간에, 나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면밀히 살펴보며 살고 싶다. 그래서 내가 만든 단어 "풍삭함"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풍삭함은 현대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로, 풍요로움 속에 감춰진 삭막함에서 유래했다. 우리는 음식과 숙박의 풍요 속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기초적인 것들을 갈망하고 삭막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풍삭한 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매일 풍삭함을 느끼며 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글을 쓴다.


이 글의 목적은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한 행복이 아닌, 삶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의 삶의 과정은 저마다 다르고, 때로는 풍요롭고 개탄스럽기도 하다. 누구나 상처 없는 삶이란 없고, 각자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본질을 바라볼 때 "풍삭함"이라는 단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하는 인간의 본질은 바로 이 풍삭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겉으로는 풍요로워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삭막한 인간성과 상처들이 숨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풍삭함을 이겨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많은 이들은 본성에 따라 살아가며 주어진 일들에 의지 없이 흘러가고 만다. 사람들은 마치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친구를 만나며, 학교에서 주입식으로 배운 지식을 습득하듯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형성된 인격체는 어느새 유행을 좇으며, 때로는 골프인이 되기도 하고, 영화인이 되기도 하며, 가정의 풍토를 바꾸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20대 동안 형성된 고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본성대로 살아가게 된다. 마치 최근 유행하는 엠비티아이 성격 유형처럼,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체로 사람은 본래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풍삭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그 풍삭함을 극복하려는 의미를 찾아 나가려 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풍요로움 속에서 느껴지는 삭막함이 나를 찾아왔을 때, 그것은 꽃이 아니라 돌처럼 느껴졌다. 마치 삶이 내게 레몬을 던지며 이겨내라고 외치는 신의 목소리처럼 다가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풍삭함을 이겨내고자 직장 생활을 시작해보았다. 그러나 직장에서 마주한 인간의 내면들은 더욱 삭막하게 느껴졌고, 나 자신도 점점 시들어갔다. 결국, 풍요로움조차 희미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피폐해졌고, 돈으로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는 그저 잠깐의 유희일 뿐이었다. 그 경험은 나에게 마치 에덴동산의 금지된 사과와 같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직장을 다니지 않기로 하고,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사람마다 고유의 풍삭함이 있다. 오늘 나는 할머니의 풍삭함을 느꼈다. 할머니에게서는 전쟁의 고통이 묻어 있는 냄새가 났고, 빈곤했지만 가족 간의 우애로 채워진 눈동자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가족이 풍비박산되면서 혼자 남으신 할머니의 기구한 인생은 삭막함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 풍요로움 속에 감춰진 삭막함이 다른 이들보다 더 짙게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내면의 "풍삭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그 본성을 풍요로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사실 정답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삭막함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행과 철저한 자기비판 속에서 조금씩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석가모니처럼 자신의 상처를 희생하여 극복해내는 과정을 이룰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풍삭함을 우리는 숙명처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중적이지만, 바꾸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강산이 변하는 데 10년이 걸린다는 말처럼, 우리의 풍요로움 속 삭막함을 진정으로 극복하려면 아마도 20년의 자기비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사람마다의 풍삭함을 찾는 여정을 떠나는 여행자가 되어, 글로 기록하고 영상으로 담아내며 창의적으로 그려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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