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비키니 사진에 우리는 기죽고 만다.
나는 카다시안 가족을 무척 애용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들의 인스타그램을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들의 삶은 너무나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가족적인데다가 자신의 커리어를 원하는 대로 쌓고 있으며 원하는 대로 가정을 꾸렸기 때문이다. 사람의 안정성과 일을 모두 잡기 어려운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족이 되었으니 얼마나 부러운가? 최근에 카일리 제너는 티모시 샬라메와 연애하면서 물오른 미모로 급부상하고 있다. 게다가 그녀의 행보 하나하나 기사거리를 낳고 있으니 현대사회에서 가장 신명나게 살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만들어낸 바디 이미지는 그러나 우리가 조금 각도를 바꿔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갈비뼈 하나정도는 없을듯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 모두 수술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겼다. 그런 바디 이미지들은 핀터레스트와 인스타그램에 무한 생성되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브라질, 멕시코, 일본 등 모두 화재다. 카다시안의 행보는 그렇게 전세계의 미모의 기준을 평정해 놓았다. 나는 그런 이미지를 어린 아이들이 보았을 떄 무조건적인 수용을 할 까봐 걱정이 많다.
비키니 사진도 완벽하다. 잘록한 허리에 마찬가지로 배 하나 없이 그려져 있다. 몸은 보여주고 얼굴이 없는 사진도 많다. 자신의 행복한 일상 중 하나인 바다에서 사진찍기를 하루에 두어번 정도 보여준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바디이다. 그 바디에 포토샵을 더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인터넷이 말하는대로 곧이곧대로 믿는 편이다.
노란 색 비키니는 햇빛을 반사하듯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렇게 바라보던 우리의 바디는 불평만 쏟아진다. 나에게는 완벽한 복근이 없다. 게다가 멍투성이의 다리 한 쪽. 어디 하나 빛 좋은 개살구라도 좋으니 그렇게라도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시작했다. 삭센다를. 삭센다란 바디이미지를 조금이라도 가깝게 만들어주는 비만치료제로 식욕을 없애주고 나의 단점을 커버해주는 요상한 주사이다. 그 주사를 매일 맞으면 나 역시 캔달 제너의 핫바디, 애밀리 라다카오스키의 허리를 빼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약이 들어갈 때마다 희망이 가득 차 올랐다. 음식은 더 이상 입맛에 맞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근력으로 운동을 나가서 극한으로 치솟았다. 나는 조금씩 저울계에 집착하게 되었다. 스타일리쉬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마른 몸이었기 때문에 나역시 그런 핀터레스트의 핫걸을 따라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삭센다를 맞은 지 약 2달이 지났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몸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나 근접해졌다. 내가 원하는 글래머는 아니었지만 가까워진 잘록한 허리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옷을 입으면 꽤나 말라보였다. 이젠 내가 당당해질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밖을 나서는 순간, 공포와 마주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화려한 몸매에 비빌 수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강남역에 돌아다니다보면 사람들의 스타일에 멈칫하게 된다. 나는 자신감이 없어서 입을 수 없는 옷들로 치장되어있다. 그들의 악세사리는 진주 목걸이부터 다이아몬드까지 모두 하나하나 몸에 박혀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나보다 잘록한 허리와 군살없는 뱃살에 사무치게 놀란다. 나보다 더 독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에 속이 상한다. 속이 상한 나머지, 밤을 즐기지 못하고 버스 안에 기어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카다시안 페이지를 들여다 본다. 그들의 삶은 예술적이고 하루하루 업적을 쌓는다. 나는 뭐하고 사는 것일까?
운동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몸과 스타일이 확고하지도 않은 나에게 패션의 철학도 흔들리게 되었다. 미니멀 이즈 더 베스트 라고도 했지만 나는 그 맥시멀리즘에서 주는 화려한 자태도 뽑내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주황색 스웨터를 줘도 어울릴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게 뭐람. 이젠 내가 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카다시안과 에밀리 라다카오스키를 보면서 나는 여자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가슴이 빵빵하지도 않아 남성의 유혹할만한 자태도 없고 옷도 어울리지 않으며 머리가 텅 빈 다이어터같이 느껴진다.
그러다가 바디 이미지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특히 한국인은 44 사이즈에 집착하게 되었는가? 어느새부터 우리는 노래도 바비같은 사람을 인정하지 말자는 운동이 펼쳐졌는가? 수술로 아름다움을 되찾아도 그건 인위적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는가? 등의 문제들이 연거푸 쏟아졌다. 잡지사마다 가진 생각들이 극과 극이었다. 혼란만 야기하고 나를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나를 도와줄 이는 없었다. 몇 곡의 노래와 책뿐이었다. 그것을 정독하거나 듣는 사람이 없다면 계속해서 44사이즈에 엉덩이와 가슴 큰 사람들로만 가득 채워진 사회의 바디 이미지만을 찾을 것 같았다.
바디이미지를 타개하고자 쓴 에세이 서적을 몇 권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그 책에서 느껴지는 바가 없었다. 결국에는 사회의 외침이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성공하려면 사회의 바디 이미지를 맞춘 상태여야만 했다. 여성인 나는 사회가 주어진 대로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물론 완전히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삭센다를 중단하고 나의 바디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혹사시키는 다이어트와 약물은 절대 안된다. 나를 내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서라도 내 몸을 아낄 줄 알아야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중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하는 다이어트는 위험하다. 그들의 정신이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숙한 바디를 원하는 것은 역설적인 발상이다. 중고등학생이 공차를 마시고 요아정을 먹으면서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의 몸매는 성인이 되어서 바뀔 수 있고 사회에 대한 외침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그 때 되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조금 훗날의 미래에는 궁시렁거리면서 내 몸의 지방을 보고도 안아줄 수 있는 다양한 타입의 바디이미지를 생산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