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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치와 고성오광대

교사는 만능(?)

by 박점복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스승의 존재가 언제부터였을까 찌그러진 깡통처럼 전락에 전락을 거듭하더니 개나 소나 모두 선생인 세월을 살고 있다.


스승이란 표현은 안타깝게도 이젠 우리말과 글살이에서는 거의 사라져 들을 수도 찾아보기도 쉽지 않은 사어(死語)가 돼버린 듯하다.


생산된 재화(財貨)마다 물론 나름대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겠지만 교사가 다루는 학생들만큼이야 하겠는가? 그러기에 교직은 누가 뭐래도 여전히 보람을 먹고사는 직종 중 하나임을 쉽게 부인할 순 없으리라.


스승을 선생으로 추락시킨 부끄러움을 무릅쓴 채 이제 당당한 직장인(?)으로 이 글을 쓴다.


안성에서도 한참이나 버스를 타고 터덜터덜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던 ◇◇면 소재 중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두근두근 설레며 떨리기도 했지만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의 아이들 앞에서 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한다는 기쁨에 수원에서 안성으로 또 안성에서 이곳 학교까지 그 먼 길이 전혀 멀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한달음에 달려온 듯하였다.


공교롭게도 같이 발령받은 네 명의 교사 중 남자는 나 혼자여서 그랬을까 당시 교감선생님의 신입교사 소개 말씀이 아주 오래전 일인데도 잊히질 않는다. 유일한 ‘흑일점(黑一點)’ 남교사 박 아무개 선생님입니다 라는 소개 멘트, 청일점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흑일점이라는 표현은 듣는 이 처음이었는데 쓰이긴 하는 말인지. 아니면 내 피부가 좀 가무잡잡해서 그러신 건 지.......


이렇게 시작된 교직생활, 초보 교사를 더욱 불안에 떨게 한 업무가 바로 그 지역 이름을 딴 ‘△△문화제’ 행사에서의 민속놀이였다. 군(郡)이나 면(面) 단위에서 개최하는 대단한 축제처럼 들리는 이 문화제는 작은 시골 중학교가 감내해 내기에는 쉽지 않았다.


10여 명이 조금 넘는 교사들 모두에게 당시 교장선생님은 전공교과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희한한(?) 업무를 떠 맡기셨던 것이다.


요즘이야 물론 교장, 교감선생님들이 의견을 모으는 절차 없이 권위주의나 독재가 판을 치던 시절처럼 막무가내로 지시하는 세월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교장선생님의 호출 전화 내지 인터폰은 죄지은 것도 없는 데 괜히 벌벌 떨어야 했던 안타까운 시절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무슨 타령에, 농악에, 강강술래, 산성제, 부채춤에 탈춤, 고싸움 등등,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교장선생님은 가시는 곳마다 그 지방 이름을 딴 문화제를 만들어 학생과

교사들에게 수행토록 했다니 분분한 평가가 늘 쫓아다녔던 분이셨다.


놀란 자라처럼 맡겨진 민속놀이에 어리둥절 정신을 못 차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0월 어느 날 문화제가 개최될 텐데 그때까지 최상의 작품을 완성해 모든 면민(面民)들, 학부모들, 유관 기관장들, 주변 학교장들을 초청해 자신의 업적도 과시할 겸 자랑도 해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는가 보다.


전공이 영어인 내게 배당된 민속놀이는 탈춤의 일종인 고성오광대놀이였다. 탈춤은 고사하고 당시 또래들이 즐기던 유행 춤까지 잼뱅이, 소위 춤치(癡)였던 내게 탈춤 지도는 너무도 벅찬 과제였다. 그 옛날 군대처럼 하라면 해야 할 뿐 변명이나 이유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교직의 길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교사, 제대로 준비 못 했다며 다른 곳으로 인사 조치를 당했던 교사까지, 무서웠던 첫 발령지에서의 교직생활이 어찌 잊히겠는가?


무슨 일이 있어도 중간발표 때마다 조금씩 발전된 모습으로 그리고 최종 발표 일엔 최상의 완성작으로 선보여야 하는 스트레스를 다행스럽게도 지도를 분담했던 미술 선생님의 한 후배가 구세주처럼 해결해 주었기 망정이지......


마치 긴 터널을 천신만고 끝에 빠져나온 완행열차의 힘겨운 기적소리처럼 너무 긴장해 탈춤 발표가 끝난 후 털썩 주저앉아버린 초보의 식은땀과 수고했다는 선배교사들의 격려가 애틋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역시 엄청나게 힘들었을 그 과정을 기어이 완수해 내시던 선생님들의 역량에 한편 놀랍기도 했지만 얼마나 측은했었는지 문득문득 그들이 떠오른다. 그때 달라붙은,


‘되든 안 되든 무조건 윽박지르며 내리누르면 대충 되긴 되는 건가?’


이상한 생명력의 끈질긴 습성이 여전히 내 주위를 맴돌다가 조잘조잘 떠들고 있는 아이들에게 불쑥 뛰쳐나오려 할 때면 화들짝 놀라면서 그때를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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