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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묘수란?

하기 싫은데요

by 박점복

수업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자마자 교사보다 먼저 자리를 박차며 지겨웠던 수업 잘 참았다는 듯 교실을 나가는 어떤 아이들에게, 반장의 "차렷!, 경례!" 군인들 같은 절도 있는 인사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가볍게 목례로라도 예의는 표시해야 한다는 순진한(?) 나의 예상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꼭 인사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교육을 포기할 수 없기에


"인사는 해야 되는 것 아니냐?"


지적에


"하기 싫은 데요"


답이 되돌아올 줄이야. 너무 어이없고 허탈하여 아이를 교무실로 불렀다.


물로 그 학생의 약간은 평범치 않은 성격을 담임교사로부터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럴 수는 없다 판단되었고 아직은 그런 태도를 이해하며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넘겨버릴 만큼 역량이 성숙(?)되어 있지 못 한 처지이기도 했다. 이미 추락할 데로 추락해 더 이상 내려갈 곳조차 없는 교사의 위치를 실감한 것이다. '얼마나 능숙하지 못했으면.....' 자책과 함께.


교무실에 와서의 태도도 아까 교실에서의 그것과 전혀 다른 게 없었다. "세상이 너 하기 싫으면 무조건 안 해도 되는 그런 곳은 아니잖니? 하기 싫어도 함께 사는 공동체이기에 해야 되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도 있지 않겠어?" 타일러 봐도 역시 교무실에 불려 온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분하다는 듯 씩씩거렸다. 이럴 때 참(?) 교육자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까?


"그럼 학교에서 뭘 하고 싶어?" 그 학생의 답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노는 것"이란다. 학교가 바르게 노는 법도 가르쳐야 하는 곳이라 생각되기에 이런 나의 대답이 옳은 것인지의 여부에 확신이 서진 않지만 얼떨결에 나온 반응은 "네가 하고 싶은 것이 놀기만 하는 것이라면 학교에 꼭 다닐 필요 있겠니?" 그 아이의 대답 또한 그 질문에 그 대답이라고 여지없이 내 입을 막고 말았다.


학교 다니고 싶은 생각 전혀 없다면서 아버지께도 말씀드렸단다.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지" 아버지 말씀 때문에 생색내듯 학교에 다녀주고 있다니.


물론 극소수에 불과함을 위안으로 삼지만 아무래도 이들에겐 영어 단어, 수학 공식은 별 가치를 갖지 못한다. 바른 인간으로 성장시킬 교육이 긴급 수혈되어야 하리라. 인간 가치의 존엄성은 어떻게 존중되어야 하며 걸맞은 평가 방법은 무엇일까?


이것도 싫고 저것도 귀찮아하는 요즘 아이들의 목표 없는 흐름을 그저 안타까워만 하는, 능력 부족이던 내게 이런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고귀한 의견을 주실 분 만나 볼 수 있길 소망해 본다.



십 수년 전 근무 시절, 내게 도전으로 다가왔던 아픈 경험을 되살려 적어 내려갔다. 지금의 우리 교실 상황은 얼마만큼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는지?

다만 예의 바르고 규칙을 성실히 준수하는 대다수의 학생들에겐 미안(?) 하기 이를 데 없는 글임을 밝히며 이해를 부탁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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