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교사들끼리의 좌충우돌은 서로 도우면서 보완해 가는 게 최상의 멘토 활동이었다, 1980년대 초반 죽산리에서는. 퇴근 시간 내 성적 전표 확인 작업 마무리는 거의 불가한 일임을 익히 인지한 터라 겸사겸사 박ㅇ숙 선생님 집에 저녁 식사 후 모이기로 약속을 잡아 두었다. 마침 그곳엔 김ㅇ숙 영어 선생님도 함께 자취하고 계셨기에 모인 숫자는 대충 5명 정도였나 보다.
모두가 객지인 이곳에서 하숙 아니면 자취로 옹기종기 모여 살았기에 가능했던 공동 작업 여건이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부수 효과까지 톡톡히 누릴 수 있었으니.
먼저 각자 자신이 맡고 있는 담당 교과의 성적 전표를 나름대로 검토한 후, 가로 세로 점수 합계가 맞아떨어지지 않을 경우 교차 점검하면서 틀린 부분을 찾아가는 절차를 진행키로 하였다. 다음 날이 성적 전표 제출 마감일이었으니 도리는 없었다.
도덕 교과에서 시작해 기술(가정) 교과까지 학생 각자의 개인별 점수 합계가 정확하게 맞아야 하고, 세로로 표시된 교과목별 점수 합계 또한 틀린 곳이 없어야 최종 전표의 가로 세로 점수가 정확하게 맞았음이 비로소 확인되는 것이다.
요즘이야 성적 처리가 최소한의 기본 사항만 입력하면 컴퓨터 프로그램이 알아서 척척 총점, 평균, 석차까지 산출해 주니...... '아니! 그런 세월이 있었나요?' 갸웃거리며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단다. '왜 그걸 손으로 일일이 고생해가면서 처리하셨나니?' 답답해서 복창이 터지지만 이해를 못하니 어쩌겠는가? 글쎄 누군들 그러고 싶어 그랬을까? 안타까운 세월의 애환을 딛고, 시행착오를 극복하고 견뎌 준 선배 교사들의 인내가 마침내 편리하게 변화된 이런 세상의 밑거름이 된 것 아니겠는가?
그때만 해도 최첨단(?) 도구였던 전자계산기를 동원하지만 역부족일 때는 역시 공동 작업이 얼마나 효과적이던지. 이상하게도 그 실수가 도무지 눈에 띌 생각 조차 없더니만 바로 옆 박ㅇ숙 선생님은 쉽게도 틀린 곳을 발견하잖는가.
"선생님! 학생 점수를 전표에 옮기면서 '3'을 '8'로 잘못 적으셨어요". '아니 그놈이 그렇게 내 눈을 슬슬 피했단 말인가요?' 정말 약 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30분 이상을 찾아 헤매었는 데도 꽁꽁 숨어 나타나지 않더니만.......
게다가 전자계산기보다는 차라리 주판이 났다며 주판알 튕기며 계산 중인 내게 은근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주판으로 계산하는 것이 훨씬 익숙한 걸 어쩌겠는가? 아무튼 그렇게 계산기가 좋네, 주판이 편하네를 따지며 나름 고집을 부릴 때가 그때였다. 근현대사 책에서나 나올 법한 희한한 옛 일들이 첨단인 양 버젓이 행세하던 시절의 아련함이다.
단계를 거쳐 교장까지 결제가 진행되지만 보기 좋게 퇴짜를 맞고 반려되어 다시 내 책상으로 돌아온 성적 전표였다.
교장님은 과연 전표 속 숫자들과 씨름하며 일일이 계산이나 해 보았을까? 전표 중간쯤에 대충 빨간 펜으로 '틱'하고 'v'로 체크한 후 돌려보낸 것은 아닌지? 아무튼 이왕 반려할 거면 어디가 어떻게 틀렸다고 친절하게 알려라도 주면 그분 체면에 큰 손해라도 됐을까.......
그렇게 가로 세로를 맞추면서 그날 밤을 거의 꼬박 새웠던 때가 왜 이렇게 그리워 못 견디겠는지? 찾고 찾아 결국 전표에서 교장으로부터 지적당한 빨간 체크 부분을 수정했을 때의 환희(?)는 마치 정상에, 온갖 어려움 이겨낸 후, 우뚝 선 어떤 산악인의 쾌거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질 않고 말고였다.
내 담당 교과인 영어 전표는 총점 계산에서 착오가 있었고, 최ㅇ기 학생의 개인 총점 계산이 2점 틀린 게 김ㅇ숙 선생님 반 성적 전표의 원인이었다. 그렇게 찾았는데도 나타나지 않더니만. 늦은 밤까지 애쓴 노력은 결코 우릴 배신하지 않았다.
서로 도와가며 함께 한 작업이 아니었더라면...... 혼자서는 그 밤을 다 세고도 아마 찾지 못하고 말고 였을 터였다. 최첨단 컴퓨터 프로그램이 하나부터 열까지, 학생들의 OMR 답안 카드 리딩에서부터 개인 성적, 등급 , 석차까지 작성해 바쳐주니 걱정 말라는 요즘 교사들이야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할 뿌듯한(?) 그러면서도 듬뿍한 정 서로 나눴던 그때, 그곳 박ㅇ숙 선생님의 자취방이 그립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