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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여자 친구 생겼어요.

신출내기 교사의 상담일지

by 박점복

재천(가명)이의 트레이드 마크는 누가 뭐래도 언제나 싱글벙글, 명랑 쾌활한 모습 그 자체였다. 그랬던 녀석이 그날따라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다. 세상 모든 고민 저 혼자 다 짊어진 양 시무룩해서는 날 찾았다. "선생님! 드릴 말씀 있는데요" 상담을 요청한단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상담자로 교사는 인기가 없어도 보통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곳저곳 자문을 구하다가 막다른 골목 어디쯤에서 막히면 비로소 찾는 선택지가 교사인 웃픈 현실을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딱히 해결 방안도 뾰족한 게 없기도 했고 말이다.


"선생님! 저 여자 친구 생겼어요. 계속 사귀고 싶거든요. 공부도 잘하면서요." 상담 겸 허락을 받고 싶다는 눈치였다.



순진하고 순수했던 세월이라 그나마 이런 상담을 교사와 해보겠다고 교무실을 찾지 요즘처럼 영악(?) 한 아이들로 넘쳐나는 시대였다면 언감생심 경험조차 쉽지 않은 사례임은 분명하다. 상담은 고사하고 들킬세라 '쉬쉬' 하며 스릴을 만끽하지 않았을는지.......


남중, 남고만 거친 데다가, 5남 1녀로 형제들이 더 많은 환경에서 자란 터라 여성들의 심리는 거의 잰뱅이 수준이었을 뿐 아니라 상담해 줄 만큼의 연애 경험도 부족했으니 난감한 건 오히려 신출내기 교사인 나였던 것이다.


편협할 수밖에 없고 한계가 명확한 내 생각을 교사랍시고, 상담자랍시고 하게 되다니 내담자인 재천이에게 해결 방안이라고 제시했던 처방에 한껏 낙심하며 교무실 문을 나서던 녀석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하다.


만일 그때 나의 처방이 '공부도, 여자 친구랑 사귀는 일도 조절만 잘하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고 말고' 였다면 어땠을까? 거창하게 역사(歷史)엔 가정(假定)이 있을 수 없다지만 그렇게 가정해 보고 싶기도 하다.



상사병을 시름시름 앓았던 황순원 작가의 단편소설 '소나기'의 시골 소년처럼 재천이 성적도 조금씩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만 마침내 끝도 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으니. 한창 이성에 눈 뜰 사춘기 소년이었잖은가. 교사인 나의 처방이 얼마나 야속했을까? 상담을 마치며 난감한 듯 고민에 쌓여 교무실 문을 나서긴 했지만 선생님 해결책은 전혀 따를 수 없고 말고였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일 지금 어느 제자 녀석이 똑같은 상황으로 날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한다면 과연 나의 처방은? 효과가 훨씬 뛰어난 스마트한 처방을 내릴 수는 있을까? 갑자기 머리가 다 지끈지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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