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은 길재 선생이 필마로 드나들던 오백 년이나 된 고려의 옛 도읍지, 길 어귀에 우뚝 선 은행나무는 그동안의 삶을 '하루'처럼 보자기에 품어 가슴속에 생생하게 묻어두었다.
말(馬) 갈기의 생김새며 올라 탄 길재 선생의 갓 끈까지 또렷하고 말고다. 영욕의 그 세월을 언젠가는 흔적처럼 남긴 채 결국은 유한한 삶의 끝을 맺겠지만. 길게는 백세까지 산다는 요즘, 한철 메뚜기의 삶을 꿰뚫어 보면서 저들과 인생 백 년의 차이는 무얼까를 머리를 쥐어짜며 알아내 보겠단다.
하루살이는 삶의 전부인 '하루'를 어떻게 시작해 마무리를 할까? 마치 인생사 젊음의 때,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중년의 세월, 지는 노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서는 우둑커니 무언가를 기다리는 노년처럼 동트는 아침, 태양 작열하는 한낮, 그리고 뉘엿뉘엿 지고 있는 석양으로 나누어 사는 삶은 똑같이 닮아있지 않던가?
일각 여삼추(一刻如三秋)라고 하루를 백각으로 나누었다는 옛 성인들의 구분처럼 15분쯤에 불가한 1각이란 순간이 3번의 가을을 보낸 3년처럼 길게 그리워하며 기다렸다잖은가?
얼마든지 하루는 오백 년을 산 은행나무도, 한철을 불태운 메뚜기도, 하루를 평생 인양 산 하루살이도 똑같은 한 생을 산 것이리라.
두 번, 세 번 번갈아가며 살 수 없는 삶에서의 하루는 오백 년, 긴 수명까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인생 백 년이나 하루살이의 하루나 여지없이 똑같고 말고이다. 하루하루가 모이고 쌓여야 한철이, 백 년이, 한오백년이 될 터이니 모든 것들의 한 번뿐인 삶은, 제 아무리 길 다한들 하루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의 심오한 원리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