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女)중 여고, 남(男)고와 남중으로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던 학창 시절...... 게다가 마치 깨뜨려서는 안 될 대단한 금과옥조라도 되는 양 '남녀 7세 부동석'의 위세에 눌려 살던 때였기에 남녀 공학으로의 학교 모습 변화는 낯설기도, 적응하는 데도 시간은 필요했다.
남학생만, 여학생만 따로 다니는 학교는 손에 꼽을 만큼 희귀한(?) 형태가 된 지 한참의 세월이 흘렀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며 차별 없이 몫을 담당하는 세상을 위해 무던 애를 쓰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여전했던 남중 여중, 여고 남고 시대이자 서울 올림픽의 해였던 1988년 여자중학교로 임지를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새록새록 독특했다.
여동생 달랑 하나, 남자 형제들만 다섯인 6 남내 집안의 맏이 었던 내겐 여학생들만의 세상은 거의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 접해 본 신비한 영역이었다. 관련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기에 여중 교직 생활 적응기는 그렇지 않은 교사들과는 사뭇 달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를 제외하고는 남중, 남고를 다녔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 내게 물었다. "여학교 근무할 때 인기 좀 있으셨을까요?" 물론이고 말고였다. "허! 허! 허!" 오로지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인기(?)를 누리던 교사들이 적잖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착각도 어느 정도쯤은 분수가 있어야 한다는데 가(假) 분수가 되어 분자만 잔뜩 커 가지고는.......
'ㄱ'자로 꺾인 건물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ㅇㅇ선생님! 나를 부르며 부끄럽지도 않은지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 쪽에서 청소지도 중인 내가 괜히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녀석들의 순수함이 눈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속칭 잘 나간다는 요즘 아이돌(idol) 그룹만큼은 아니었어도 못지않은 환호였다면 믿을 수 있을는지.
지금 쯤은 사랑하는 아이들 키워가며 가물가물 떠오르는 선생님 얘기에 남모를 웃음 지으며 순수를 오버랩시킬 때도 없진 않을 터. 물론 떳떳하게 혼자만의 멋진 삶을 꾸리는 친구들도 있을 테고 말이다.
당시 한창 뜨고 있던 이상은의 '담다디'를 원 가수보다 훨씬 뛰어나게 잘 부르며 어렵기만 한 그 춤을 따라 하던 우리 반 '유리(가명) 모습도 너무 생생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전혀 구김 없이 활달했던 당당함과 더불어.
차원이 다른 깔끔하고 높다란 저 여학교에서는 학처럼 늘 '우아한 삶들만 펼쳐지겠지'라는 환상이 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라리 깨지지 말기를 은근히 바랐건만........ 무지했던 영역의 현실화가 가져다준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아무나 누구나 누릴 수 없는 제자들의 진심 어린 축하 속에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식까지 올렸으니 어찌 그때 그곳 여중 근무 시절을, 가끔씩 날 착각하게 만들었던 녀석들의 환호를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또 다른 나머지 반 쪽의 삶을 가르쳐 준 삶의 배움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