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이 쌩한 한겨울 같은 반응은 뭐지......' 갑자기 쳐들어 온 공격에 이유도 모른 채 어리둥절했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에 식은땀이 쭈욱 흐르곤 한다. 수군수군 뒷담화까지 정말 견디기 쉽지 않았다. 이유라도 알았다면 덜 답답했을 텐데 말이다.
한참이나 지난 후 남학생 반 수업에서 알게 된 흉흉(?)했던 소문의 원인이라니.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고대 중국의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고방식에서 유래했다는 사내 남(男) 자와 계집녀(女) 자의 제자(製字) 원리가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의 아픈 유물로 여전히 남아 여성들을 아프게 하고 있단다. 때때로 그 힘을 발휘하려 호시탐탐 꿈틀대며 기회를 노리기도 하고 말이다.
남성 위주의 교육이 행세하던 시절, 깊이 박혀 쉽게 지워낼 수조차 없던 흔적이 '성인지 감수성'이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상황의 출현으로 천지개벽하듯 바뀔 줄은. 딱히 따로 의도치 않았는 데도 불쑥불쑥 의식할 틈도 없이 튀어나와 특히 여성들의 트라우마를 파냈으니 이런 어리석음이 저지른 피해는 고스란히 그들이 감내하던 아픔의 시대였잖은가.
몰랐다며,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해결될 일은 결코 아니고 말고다. 이유를 댈수록 추해질 뿐이다. 염치없지만 이제야 깨우쳤음을 고하며 이 글을 남기려 한다.
자투리 시간 사내 '남'과 계집 '녀'라는 한자의 제자 원리를 왜 설명하게 됐는지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이처럼 큰 사단으로 번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하고 말고였다. 아무리 의도치 않았다 항변해도 용인되지 않는 엄혹한 현실, 성차별 금지법이 제정되고 성인지 감수성에 예민해야 하는 현실에서는 말이다. 한문 교사도 아니면서 주제넘게......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체성을 자극하고 말았으니. 대부분 학생들은 무관심했거나 반응조차 없었지만 예리하게 잘못을 지적하며, "선생님! 그건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차별에 근거한 정의를 우리에게 설명하세요."
그 반응에 뭔가로 심하게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이 휙하니 스쳐 지나갔다. 뒤통수가 왜 그렇게도 뜨거웠었는 지도 어렴풋이 알 듯도 했다. "얘들아! 저 선생님 왜 저러시니? 정말 실망이야"
'아이쿠! 이 상황의 수습책은 무엇일까.......' 머릿속이 하얘지며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얘들아! 선생님 생각이 그렇다는 게 아니냐." 그냥 신중하게 생각지 못하고 학창 시절 옛 선생님들로부터 들었던 생각이 주책없이 떠올라 전했을 뿐이야!"
말이란 한 번 입 밖에 나오면 다시 주어 담을 수는 없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한 후 뱉어야 함을 비싼 댓가 지불하며 다시 배우게 되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던 상황을 이도 저도 아닌 채 어정쩡하게 마무리하고 수업을 마쳤던, 다시 생각조차 하기 싫은 상황이라니.
이렇게 봉합되는 줄 알았는데, 며칠 후 남학생 반 수업에서의 돌발 질문이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 "선생님! 여학생반 수업에서 성 차별하는 한자어 설명하셨다면서요?" "너무 하신 거예요!" 자신들에게도 설명을 해달란다. 남자의 입장에서 한 번 판단해 보겠노라며. 또 한 번 온몸에 식은땀이 쭉 흐르며 아찔했다.
"얘들아! 선생님의 성인지 감수성이 많이 부족했어! 염치없지만 이해를 부탁해" 긴 교직생활을 마무리하는 학교에서 벌어진 너무도 큰 오점이 된 사건을 통해 아무리 본의가, 의도한 바가 전혀 아니었어도 상대에게 가해질 큰 파장을 배려하고 또 고려했어야 함을 깨우친, 그러면서도 아프게 남아 있는 사단이었다.
그때 입었던 상처로 아팠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염치없지만 아량을 구해 마지않는다. 왜 하필 그때 내 담당 교과인 영어와도 무관했던 男과 女라는 한자어를 설명했는지...... 여전히 고개만 갸우뚱거려질 뿐 나도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지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