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오키나와가 더 궁금해졌다. 푸른색을 풀어놓은 듯 절정의 아름다운 섬에 무슨 비밀이 있을 것만 같았다.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기후도, 음식도 비슷했다. 바람이 많고. 돌담이 있는 골목, 제주도의 돼지고기국수와 오키나와의 소바 요리가 비슷했다.
오키나와의 성벽 역시 고려의 축조방법과 매우 흡사했다. 고려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난 이 부분이 매우 궁금해졌다.
오래전 오키나와 [역사 추적] 방송을 관람했다.
오키나와를 더 이해하고 싶어졌다.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해 왔을 때,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몽골에 항복했고, 고려는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예부대 삼별초는 몽골에 항복하지 않았다.
삼별초의 항쟁(1270~73) 시작되었다.
5,000여 명의 삼별초는 강화도의 궁궐에 있던 식량과 보급품들을 1,000척의 배에 나누어 실고, 전략적 요충지 진도에 이르렀다. 그 많은 식솔들까지 움직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을 것이다.
진도는 육지와 가깝고, 싸움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좋은 곳이었다. 일부 경상도까지 탈환했었다.
삼별초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몽골과 싸워서 독자적인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고 했었다.
진도에 성을 쌓고 왕궁을 짓고, 새로운 왕을 추대하였다. 삼별초가 이렇게 거대한 일을 추진했었다는 점이 새롭게 와닿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게 군사동맹을 맺자고 외교문서를 보냈다.(고려첩장불심조조)
몽골은 일본을 침략할 것이다 같이 싸우자고 했다. 일본은 고려정부가 아닌 삼별초를 이해하지 못했고, 응하지 않았다.
독자적인 삼별초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도는 함락되었고, 일부는 제주도로 옮겨갔다. 제주도에서 다시 성을 쌓고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모두 패했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사 속으로 살아진 줄 았었던 삼별초의 흔적이
오키나와에서 발견되었다. 진도 용정산성에서와 똑같은 기와, 수막새, 고려의 성벽 등이 나온 것이다.
흥미진진했다.
오키나와는 유적지 발굴 중 고려의 기와가 쏟아져 나왔다.(계유년고려와 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
라는 글자가 또렷이 쓰여 있었다. 계유년에 고려 장인이 기와를 만들었다.라는 글씨였다. 계유년은 1273년 제주도에서 몽골에 패한 시기였다. 제주도에서 삼별초의 일부가 다시 오키나와로 떠난 것일까? 봄바다를 타면 그냥 오키나와에 닿을 수 있다고 한다.
오키나와 여행 중 슈리성의 성벽은 부드러운 곡선형이었다. 성벽은 싸움을 위한 성벽이 아니었고, 류큐왕국의 성장과 독자적인 성곽이었다. 고려의 성과 매우 흡사했다.
류큐 왕국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삼별초와 오키나와를 잇는 단서, 진도 용정산성에서 발견된 수막새와 기와는 고려의 연화문(연꽃잎 둥근 씨방)과 어골문, 우상문
(물고기, 새깃털 모양)이였다. 오키나와 것과 일치했다. 우라소에서 발견된 기와에 계유년이라는 글자가 삼별초가 진압된 해 1273년의 계유년과 같았다. 그 시기에 신석기시대를 살던 오키나와에 새로운 문명, 류큐왕국을 세운 건 삼별초가 아니였을까?
이쯤 되면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류큐왕국은 이후 해상왕국으로 중국, 대만, 베트남까지 교류를 확장하면서 450여 년 평화를 유지하다가 19c에 일본에 편입되었다.
고려를 떠난 삼별초는 류큐왕국에서 새로운 터전을 만들었고 발전시켜 나갔다. 지금도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이라기 보다 독자적인 독립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독자성엔 몽고에 끊임없이 항쟁하며 자주 국가를 원했던 삼별초 정신의 역사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키나와를 여행하고, 오키나와 역사를 알게 되었다.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우리 조상들의 뿌리를 두고 있는 오키나와 그 푸른빛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또 다른 시선의 발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