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초 바다에게 묻는다

오키나와 전투

by 녹주고우

산호초 바다에게 묻는다. 오래전의 이야기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바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온했다. 난 유선형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을 평화롭게 바라보았다.


그 곳에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일본의 그물망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이겼다. 대한제국은 식민지가 되었다.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만주 사변까지, 심지어 동남아시아 전역을 손안에 넣어 버렸다. 일본의 야욕은 전체주의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1894~1945)


일본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반도를 손쉽게 차지했어, 어떻게요? 때마침 유럽에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거든. 독일이 프랑스를 함락시켰을 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는 힘쓸 겨를도 없이, 일본이 차지해 버렸어.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일대까지 다 차지해 버렸지, 특히 인도네시아에 석유, 고무 등 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고 더 탐욕을 내고 있었거든, 일본의 질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


가만히 생각해봐, 미국은 일본이 선을 넘는다고 생각했어, 미국령 필리핀, 괌도 다 일본 손에 넘어갔어, 미국은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겠지.


이때

미국은 일본에게 중국땅과 동남아 일대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라고 했어. 그렇지 않으면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석유 수입 등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거야. 일종의 경제적 재재를 가한다는 거였지,


그럼 일본이 빼앗은 땅을 돌려놓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일본은 오히려 미국을 침략하기로 결심했어.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기로 말이야, "진주만" 영화도 , 미국의 피해는 엄청났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던 미국은 이제는 가만있지 않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들었어, 미국도 처음에는 일본에게 고전하며 밀리고 그랬지.


그럼 일본은 이후에도 태평양전쟁에서 매번 승리하며 승승장구하였나요? 그건 아니었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판새를 바뀌어 놓았어,


태평양 전쟁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부터는 공세가 미국 쪽으로 기울어졌어. 태평양의 작은 섬들, 하나하나 일본으로부터 탈환하기 시작했지,


남태평양의 과달카날 섬은 미국과 호주를 잇는 요충지였다. 일본은 이곳을 차단하기 위해서 비행장을 건설했고, 미국은 가만있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전투도 치열했고 미국이 승리로 끝났지. 기세를 몰아서 필리핀, 사이판 등 모두 탈환했다.


태평양 주도권 빼앗긴 일본


이제는 일본 본토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일본은 패배 항복을 했어야지, 더 이상이 국민들 희생시키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일본은 그렇지가 않았다. 광기는 더 극에 달했어.


인간 전투기 카미카제 들어 보았지, 인간폭탄이 되어 적군을 향해 돌진하며 몸을 날리는 거, 어린 학도병들을 끌어모아 고결한 희생으로 포장하였더구나.


오키나와 전투


일본 본토를 향한 마지막 방어선 오키나와 전투, 일본은 무너질 위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끝까지 본토를 지키려고 했어. 오키나와를 희생양으로 (1945,4.1~6,23)

미국은 이오지마 전투의 승리로 이미 일본 도쿄 공습은 시작되었고, 일본은 파멸의 길로 가면서도 오키나와 방어선 만은 끝까지 지키려고 발악을 했던 거야.


오키나와의

'기쿠스이 작전'(가미카제특공대)은 10차례, 기쿠스이는 '국수菊水' 즉 '물 위에 국화'라는 뜻이다,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끝까지 보필한다는 뜻이었다, 미군에 타격을 주었고, 양쪽 사상자도 많이 발생했어. 이렇듯 발악을 하며 방어선을 지켜내려간 거야,


"살아서 치욕을 겪지 말고 죽어서 죄과의 오명을 남기지 마라." 주민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

들에게까지 수류탄을 나누어 주고 한쪽은 미군을 향해 던지고, 다른 한 손의 것은 자폭하라고 했다. 서로 죽이고 집단 자폭 하도록 명했다는 거였지. 그렇게 황민화 교육을 받았고 맹목적인 복종이었어,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는 신이었어, 신을 지켜기 위해 그렇게 많은 희생을 자초했던 거야, 사실 그뿐만은 아니었지. 군 수뇌부를 지키기 위해서 항복은 곧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후 포츠담선언에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 하기 전, 일본 수뇌부에 무조건 항복하면 국민을 구하는 일이다고 알렸지만 항복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두 번의 원폭을 맞고 항복했다. 일본 국민들이 엄청난 피해를 보고 나서 항복했다.


왜 끝까지 항복을 늦추었을까? 자존심의 극치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같은 것인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과. 곱지 않은 시선에도 지금도 그 정신을 야스쿠니 신사로 가지고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1945,8,15



오키나와 전투(83일) 전사자

미군 2만 7천여 명

일본 7만 4천여 명

오키나와 주민 12만여 명


나는 이 숫자에 다시 한번 놀랐다.


마무리

오키나와는 아름다운 섬이었고, 축복의 땅이었다.

산호초의 바다에는 슬픈 역사가 깃들려져 있다는 것을, 슈리성 발길 닿았던 곳에 치열했던 전투지였다는 것을, 폭탄이 쏟던 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 고요하게 다가선다.


어제보다 또렷이 보이는 오키나와.

욕망의 끝은 파멸에 이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계사를 들려다 보면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다. 빈틈으로 햇살이 비치는 시기에 사는 사람들,

우리는 항상 평화의 시대를 사는 것으로 착각한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아주 작은 부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전쟁 한가운데 태어나고 살았던 사람들은 이토록 아름다운 평화를 알지 못한다.


전쟁의 역사는 다시 없어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도 또 다른 곳에서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인류의 평화는 고귀하고 더불어 공유해야 할 공동의 산물이.

진주만
오키나와 전투
원자폭탄 창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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