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국장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정돈된 머리와 하얀 셔츠에 주름이 잘 잡힌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결재를 들어갈 때마다 긴장감이 돌았다.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결재판을 책상 위에 놓다 시선이 그의 구두 위에 잠시 머물렀다. 구두는 신고 나간 적이 없는 것처럼 반들반들 윤이 났다. 그는 장황하게 말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궁금한 것을 물어볼 때만 답을 했다.
그는 업무 능력이 뛰어나 초고속 승진을 했고 스캔들 한번 없이 자기 관리가 뛰어나 요직에만 있었던 상사였다. 그는 조직의 보스 같은 아우라가 가져 두려운 존재였지만 한편으로 닮고 싶은 상사였다.
그날은 연말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6시 업무를 마치고 회식 장소로 갔는데 이미 많은 직원들이 참석한 상태였다. 테이블마다 6명이 한 조가 되어 앉아 있었고 커다란 홀에 삼겹살과 야채, 몇 가지 음식이 세팅되어 있었다. 직원 모두가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국장이 들어왔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병과 잔을 들고일어나 테이블을 돌기 시작했다. 70여 명이 넘는 직원들에게 소주와 맥주를 혼합하여 따라주었고 직원들이 건네주는 술까지 마셨다. 그 많은 잔을 마시고도 쓰러지지 않는 무슨 비밀 병기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술자리가 절정에 다다르면 그가 건배사를 하고 직원들은 다 같이 일어나 ‘위하여’를 세 번을 하고 원샷을 했다.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국장에게 술을 따르지 않았던 사람은 다음번 인사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괴소문까지 돌았다. 우리는 회식도 근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고 그런 상사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50~60대는 하면 된다는 믿음을 가진 세대다. 그들 앞에 90년 대생들이 등장했고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납득이 가야만 하는 세대였다. 그들은 수평적 관계를 요구했다. 점심시간에 부서장과 밥을 왜 같이 먹어야 하느냐? 회식을 왜 강요하느냐? 등의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노조에서 윗사람 모시기 문화를 없애란 공문이 왔다. 우리 국장도 부담 주기 싫다며 부서별로 돌아가면서 밥 먹는 것을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젊은 친구들은 대체로 9시에 출근하고 6시가 되면 퇴근했다.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쯤은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겼던 우리 세대는 그들이 야박하고 버릇이 없어 보였다. 젊은 세대는 6시 이후에 퇴근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며 우리를 꼰대 취급했다.
내가 처음으로 90년대 직원과 대면하게 된 것은 동자치센터 동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남자 직원인데도 앞머리에 커다란 구르프를 말고 헐렁한 옷에 슬리퍼를 신고 캠핑을 하듯 일을 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90년대 직원이구나. 놀랐지만 애써 이해하는 척, 너그러운 척했다.
동사무소에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재난 근무를 서야 할 때다. 눈이 내리면 염화칼슘을 차로 싣고 골목골목에 뿌려야 교통대란을 막을 수가 있다. 그날은 밤 11시부터 눈이 내렸고 급하게 날아온 재난 문자를 보고 사무실로 나왔다. 당연히 담당자가 나와서 준비했을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담당팀장이 전화했지만 전원은 꺼져 있었다. 그 밤에 다른 직원들까지 오라고 하기 싫어 팀장과 둘이 염화칼슘을 뿌리며 하얀 밤을 지새웠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심한 아토피 때문에 옷도 헐렁하게 입고 머리가 이마에 닿지 않게 잠시 구르퍼를 말고 있었던 거라 했다. 눈 내리던 밤도 아토피가 너무 심해 약을 바르고 잠이 들어 못 나왔다고 전해 들었다. 속 좁게 은근히 미워했던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도 꼰대다. 90년대생 딸과 이야기할 때 습관처럼 ‘그건 틀렸어’라고 말한다. ‘엄마 그건 틀린 게 아니고 다른 거야’ ‘아 미안’ 나도 모르게 나와 맞지 않는 의견은 틀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 했다. 왼손을 쓰면 오른손으로 쓰도록 강요받았다. 그땐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참 이상한 논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 문화도 현행화시켜야 한다. 직장은 일을 하려 모인 장소이고 그 모든 구성원은 동료이다. 매일 이렇게 머릿속으로 되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