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도쿄로 떠난 미술 여행은 겨울의 끝자락에서 만난 이른 봄날의 따스함 같았다. 차가웠던 계절을 뒤로하고, 도쿄의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푸르렀고, 사람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나도 덩달아 온몸이 가벼워지고, 발걸음마저 경쾌해졌다. 여행자의 기대감은 매화나무 가지 위 새싹처럼 부풀어 올랐다. 지난해 국립서양미술관, 국립신미술관, 모리미술관 등 도쿄 곳곳의 미술관을 발길 닿는 대로 다녔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날 방문한 도쿄도 미술관에서의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순간이었다.
도쿄도미술관에서는 2024년, 인상파 첫 전시회 개최 150주년을 기념하여 유럽, 미국, 일본의 인상주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대규모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미국 보스턴의 우스터 미술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모네, 르누아르, 쿠르베, 시슬리, 세잔 등 프랑스 인상파 거장들의 작품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미국·유럽·일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
그날, 전시장 입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한 줄로 이동하는 관람객들의 모습은 다른 도시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게 충분했다. 어둑한 실내, 작품을 비추는 조명만,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멈추고 작품을 보고 있었다. 오롯이 자신만의 작품과 마주했던 순간,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지난해 도쿄에서 봤던 그 전시가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의도 더 현대 서울 ALT.1에서 전시가 이어진다는 소식은 반가웠다. 마치 먼 곳에 있던 친구가 일부러 나를 만나러 오는 느낌이었다. 이 운명 같은 재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망설임 없이 예약을 하고, 다시 인상파 작품들 앞에 섰다.
1년 전 도쿄도미술관에서 마주했던 작품들이 낯설지 않았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반가운 얼굴을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림은 그대로였다. 그날의 빛과 색, 감정까지도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 전시는 우스터 미술관의 소장품인 인상화 화가들의 작품들이다. 우스터 미술관은 1898년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시에 설립된 유서 깊은 미술관으로, 1910년 클로드 모네의 ‘수련(Water Lilies)’을 매입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필립 J. 젠트너 관장은 프랑스 인상주의에 매료되어 파리 뒤랑 뤼엘 갤러리에서 이 작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바로 그 모네의 ‘수련’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모네는 빛과 색의 변화를 담아내기 위해 같은 장소에서 다양한 시간대에 그림을 그리는 연작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특히, 그가 말년에 집과 정원을 가꾸며 탄생시킨 ‘수련’ 연작은 자연 속 빛과 색의 변화를 끊임없이 탐구한 작품이다. 지베르니에서 직접 만든 “물의 정원”에서 그린 ‘수련’은 수면 위 반사된 하늘과 나무,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빛의 움직임을 통해 끝없는 공간감을 선사한다. 그림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모네의 정원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간의 빛과 색을 화폭에 담아 감성을 전달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들의 그림 속에는 햇살 아래 반짝이는 강가,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 해 질 녘 붉게 물든 하늘이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다.
19세기 후반, 인상주의는 프랑스를 넘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국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차일드 하쌈, 메리 카사트, 존 싱어 사전트 등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었다.
도쿄 전시를 본 이후 좋아하게 된 차일드 하쌈(Childe Hassam, 1859-1935)의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하쌈의 ‘애플도어의 실프 바위’는 바위 주변을 휘몰아치는 거친 물살이 붓질을 통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도시와 해안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애플도어 섬은 문학과 예술계의 엘리트들 사이에서 유명한 휴양지였다고 한다. 하쌈의 그림은 색감이 풍부하고, 마치 그림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의 또 다른 작품에서는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정원에서 여인이 꽃을 한 아름 안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원에서 막 꺾은 꽃들이 가득 담긴 꽃바구니가 길가에 놓여 있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사랑스러운 꽃을 손에 들고 있다. 저 멀리 한 남자가 평화롭게 책을 읽는 모습도 보인다. 그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햇살과 공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에서 다시 만난 인상주의 작품들은 1년 전 도쿄에서의 기억과 맞물려 더욱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같은 그림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시선은 1년 전과 다르게 변화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림들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감동을 느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간의 빛을 포착하려 했지만, 그들의 그림은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림 앞에서 느낀 감동과 여운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고, 다시금 미술관을 찾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빛을 사랑한 화가들이 남긴 작품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 묻혀 있던 감각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