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직장을 그만두고 지난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진 고동색 나뭇가지를 보면서 이대로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봄을 기다릴 만큼 계절을 타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김없이 찾아온 봄이 싫진 않다.
연녹색 잎이 삐죽삐죽 나오는가 싶더니 봄꽃이 여기저기 투둑거리며 일제히 피어 꽃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다.
창문 너머 만개한 새하얀 벚꽃 잎이 흰 구름 같기도 하고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솜사탕 같기도 했다. 매년 보는 꽃이라도 이 계절이 되면 괜스레 사람 마음을 들뜨게 한다. 가끔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봄바람에 꽃잎이 머리와 어깨 위로 비처럼 내리기라도 하면 봄 처녀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초록 잎사귀와 연분홍 꽃잎이 수채화 물감처럼 물들어가면 집에만 있을 재간이 없다.
그곳이 어디든 떠나고 싶어 진다.
봄밤
좋은 사람들과 봄밤을 함께 보내고 싶어 괴산으로 캠핑을 왔다.
밤하늘 콕콕 박힌 무수한 별들을 보며 여드름난 사춘기 소녀처럼 밤새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봄밤, 우리들은 들떠 있었고, 준비해 온 음식을 테이블에 세팅했더니 CF에 나오는 감성 캠핑의 그림이 되었다. 불에 잘 익은 스테이크와 와인을 곁들여 먹는 저녁 식사는 한껏 사치스럽다.
불멍을 하기 위해 이동식 철제 화덕에 나무를 한가득 넣어 불을 붙였다. 연기가 나던 나뭇가지에 불길이 붙기 시작하고 와인잔을 들고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으니 젊은 날로 돌아간 것 같다.
불길이 솟아오르며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시골 밤공기를 타고 하늘 위로 사라진다.
둥그렇게 화덕 주의로 둘러앉아 남편과 자식이야기, 직장생활과 퇴직, 좋아하는 취미에 관한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오랜만에 많이 웃었다.
밤이 깊어지자 불길은 허공에서 이글거리며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고 우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적막했지만 따사로운 무언가가 우리를 감싸 안는 기분을 느끼며 그렇게 봄밤을 보냈다.
봄길
어젯밤 계곡 물소리와 풀벌레 울음에 잠을 설쳤는데도 아침 일찍 일어나 괴산 산막이 길로 트래킹에 나섰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인파에 떠밀려 걸어갔는데 주말인데도 한산해 호젓하게 걸을 수 있어 좋다. 괴산댐 호수를 끼고도는 옛길은 데크길이 잘 조성되어 있고 걷는 동안 소나무는 물론 다양한 나무와 꽃을 볼 수 있어 좋다.
키 큰 소나무 사이로 놓인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걷다 보면 콧잔등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게 초여름 날씨처럼 덥다. 큰 소나무들 사이에서 키 작은 진달래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피어 눈길을 끈다.
진달래 너머로 개나리가 군락을 이뤄 노란 담장을 만들고 그 뒤로 잔물결이 일렁이는 호수가 한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걸어가는 사람들과 호흡하며 가는 길이 정겹다.
길을 걸으며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란 시를 음미해 본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하생략)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는 시인의 말처럼 나는 새길을 걷고 있다.
나와 젊은 날을 함께한 직장을 떠나고 후련함과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던 나에게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는 시인의 말에 마음이 누그러진다.
길 위에 작은 꽃과 풀들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 사이 반환점에 도착했다. 돌아갈 때는 배를 타기 위해 벤치에 앉아 호수를 멍하니 보며 물멍의 시간을 즐겼다. 선착장에는 나무 그네만 덩그러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이 고즈넉하다.
호수의 물을 가르며 우리 곁으로 다가온 배를 탔다. 우리는 창밖 풍경을 한참을 바라보며 끝나가는 여행을 아쉬워한다. 맑은 하늘과 작은 산을 뒤덮은 개나리도 떠나는 우리를 물그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매일 인생의 새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