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me

꽃이 지면 잎은 더 푸르르다.

by 이소희


작년 이맘때즈음, 탤런트 나문희 씨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77세의 나이, 데뷔 57년 만에 최우수 연기상을 받은 그녀에게 사람들은 나문희 전성시대라는 말을 했다. 넘어지고 일어서고 좌절하고 성장하면서 버티고 도전하다 보니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82세에 뜨거운 씽어즈란 그룹의 멤버로 무대에서 동료들과 함께 'This is me" 란 곡을 불렀다. 고요한 가운데 전주가 흐르며 파르르 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로 첫 소절이 시작되었다. 음정이 불안했지만, 가슴이 뭉클했다. 나이 80이 넘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새내기처럼 풋풋해 듣는 이를 설레게 한다. 그 노래가 너무 좋아서 한동안 듣고 또 들었던 적이 있다.


캄캄한 어둠 속으로

새어 오는 바람 내몰리던 작은 몸짓들

누군가에게 또 잊힐까

뒤척이다 깨어 창백한 아침을 보네


(중간생략)


난 믿어~~ 날 믿어. 이건 내 눈물이야.

This is me. 차가운 세상을 향해~~~




요즘, 퇴직하고 이유 없이 몸이 아팠다고 하고 누구는 우울증까지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가끔은 퇴직한 선배의 부고 소식까지 들을 때면 가슴 한쪽이 아리다. 그들은 잊힌다는 두려움과 변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며 마음 앓이를 하고 있는 중이지만 곧 이겨내리라 본다.


도심 한가운데서 수많은 사람중에 나만 남겨지는 것 같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퇴직은 신나는 일이다. 이제야 수많은 관객이 있는 무대 정중앙에서 나에게만 비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나의 삶을 오롯이 내 맘대로 연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젊은 날! 얼마나 고달팠나? 대학에 가야 했고, 직장을 구해야 했고, 정신없이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집을 마련하며 아등바등 살아왔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나의 대답은 NO다.


퇴직하고 5개월이 흘렀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끌리는 대로 살고 있다.


미술관에 근무하면서부터 블로그에 전시와 미술에 대한 잡다한 생각을 글로 쓰고 있다. 3개월 전에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라는 책을 블로그에 소개한 적이 있다.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되고 93세에 《타임》지 모델이 된 화가 모지스에 관한 책이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76세에 관절염으로 농사일을 하기 힘들어지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기며 미국 국민화가의 이야기다.



모지스 할머니를 알게 되고 용기를 내 민화와 수채화를 시작했고 살면서 처음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궁중 모란을 그리기 위해 모란의 꽃잎과 줄기, 잎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이쁘고 사랑스럽다. 꽃하나에도 마음이 가는 그런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다 퇴직 이후 가능해진 거다.




지난주 오랜만에 옛 동료들을 만났다. 젊은 날 열정을 가지고 우리 도시를 멋지게 만든 주역들로 반가운 얼굴들이다. 그들은 소위 기획통이라 불리며 새벽부터 자정까지 도시의 밤을 지켰다.

그 시절에야 넘사벽 선배였고 상사였지만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퇴직 한 달을 앞둔 직장 상사 S는 머리 좋고 추진력이 탁월하여 주요 보직을 두루 맡았었다. 지금은 대학에서 뉴미디어 분야의 색다른 공부를 하며 유튜브까지 제작하며 퇴직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 연말 퇴직을 한 K도 올해부터 기업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했다. 이분도 한때 우리 조직에서 혀를 내두를 만큼 일에 완벽하고 스마트했던 분이다. 그런 그가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느라 많이 힘들었는지 살이 빠져 슬림한 모습으로 나타냈다.


그동안 일과 사람에 치이면서 참 열심히들 살았다. 마음 한 곳에 아쉽고 서운한 것도 있겠지만 현재 자신만의 무대에서 활약 중이다.

그들은 더 이상 왕년의 스타도 역전의 용사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 주인공이며, 그들의 전성시대이다.


지난 4월 벚꽃이 바람에 흩날려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슬퍼했지만,

5월이 되니 수선화랑 장미, 작약, 해당화가 피어나 세상을 기쁘게 해주고 있다. 조금 일찍 핀 꽃들은 다른 꽃들이 피어날 때쯤 자리를 내어주는 게 세상의 이치다. 꽃이 지면 잎의 시기를 가진다. 풍성한 초록의 잎은 꽃잎과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의연하게 살면 그만이다.


젊은 날처럼 더는 계획을 세워 빡빡하게 살진 않을 생각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끌리는 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가련다.

이대로 살아도 괜찮냐고 누군가 물으면

This is me. 이게 나라고 답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