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이란 정해진 영역이나 길,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지난해만 해도 주중에 일이 아니 무언가를 한다는 것, 직장 말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일은 나에게 있어서 일탈이었다.
숨 막히는 회의와 검토할 서류만 있었던 직장에서는 성과나 월급, 승진이 나의 전부였다. 그 외 것은 일탈이고 사치였다. 조직의 목표가 내 인생 목표라 착각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살았다. 여유는 게으름이라 생각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주말에도 사무실 구석에 쭈그려 앉아 못다 한 일을 하면서도 잘살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런데도 깊은 잠을 못 자거나 잠이 들어도 새벽에 깨는 일이 종종 있었다. 동이 트려면 멀었는데 생각이 끝도 없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퇴직 즈음 조직의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조차도 예민해 잠을 못 자는 나를 원망했다. "부조리 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 인간은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부조리를 견딜 뿐이다."라는 어느 작가의 글을 보며 그것도 못 견디냐고 나를 힐책했다. 견뎌내는 것이 단단하게 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답답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6개월 전과 지금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산다. 아침을 먹고 이팝나무에서 떨어지는 하얀 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길을 걷는다.
아카시아가 한창인 지금 매미산에 오르면 꽃향기가 기분 좋게 자극한다. 계단이 많은 구간을 오르려면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면서 멈춰 서기를 반복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잠시 평탄한 길이 나오는 방공호 주변에서 가져온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쉬고 있노라면 온통 연두색 풍경이다. 빽빽한 소나무 덕에 들숨과 날숨 사이로 솔잎 향이 폐 속 깊이 들어오면 피톤치드가 몸과 마음마저 정화해 준다.
곤줄박이와 딱새 우는 소리가 어느 산사에라도 앉아있는 듯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정적을 깨는 딱따구리가 드럼을 치듯 다다다닥 다다다닥 나무를 두들긴다. 그 소리가 경쾌하다. 숲 안에서는 풀과 나뭇가지, 바위와 돌멩이, 작은 벌레까지 모두가 친구다. 숲밖에 사는 나는 이런 존재들을 모르고 살았다. 내가 사는 도시 안에 참 다양한 생물들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오십이 넘어 알게 되었다.
평생을 붙들고 있던 강박에서 이제야 자유로워지는 기분, 저 자연 안에서 얼마나 무의미한 것을 붙잡고 살았는지 알게 된 것은 퇴직이 준 선물이다.
5월의 햇살과 숲 속의 신선한 공기가 지난 세월의 고단함에서 나를 해방해 준다.
이 숲 속에서 모두가 공존하는 삶을 배운다. 어려서부터 뭐든 더디게 배웠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세상의 이치를 이리 더디게 알게 되었다. "더디게 자라는 나무가 단단하다"는 말로 나의 어둔함을 넘어가 준다.
무조건 버스 타고
여행은 언제나 무지개 같은 거였다. 손에 잡히지 않는 저 하늘 무지개처럼 내 거인 듯 내 거가 아니었다. 친구들이랑 여행 날짜를 맞춰도 시급하게 떨어지는 일들이 많다 보니 출발 못 하고 위약금만 낸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일정에 맞춘 배려에도 끝끝내 나만 못 떠난 여행, 친구들이 현지에서 보낸 사진을 보면서 두고두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 기차나 버스를 타고 내가 사는 도시를 벗어나는 일탈을 감행한다.
여행하면 늘 누군가와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배낭 하나 메고 계획 없는 여행을 조심스럽게 떠나본다.
혼자 하는 평일 여행은 차분하고 여유롭다. 버스를 타고 낯선 도시의 미술관에서 한나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감상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미술 도서 하나 배낭에 넣고 보고 싶은 전시를 찾아 무작정 떠난다. 국내에도 좋은 전시들이 많아 찾아다니며 블로그에 정리하다 보니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다. 전시가 끝나고 오늘도 창 넓은 고즈넉한 카페에서 허브차 한잔을 앞에 두고 창밖의 풍경을 보는 여행으로 나만의 하루를 보낸다.
영알못의 느린 영어공부
장점 중 하나가 잘하는 건 없어도 포기하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늘지 않는 영어회화 실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J와 10년째 영어 공부 중이다. 일주일 치 외워야 할 패턴 예문과 시사영어를 정리해서 J에게 보내고 일주일 동안 외워 월요일에 시험을 본다. 공부는 따로 책상에 앉아하는 게 아니라 집안일할 때, 걸어 다닌 때 랩처럼 중얼중얼 내뱉는다. 20여 문장이니 하루 3문장 정도 입에 붙여 툭 치면 나올 때까지 반복하다 보니 느리지만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서유럽에 가서 유럽피안처럼 잔뜩 멋을 내고 카페에서 커피 주문도 하고 외국인과 간단한 이야기도 하며 현지문화를 즐겼다. 중년이 되어서야 외국어 울렁증에서 겨우 벗어 났지만 나 스스로 즐겁기 그지없다. 가벼운 여행 영어지만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니 자신감이 붙는다. 이것 또한 참 더디게 배웠다. J도 나처럼 영알못으로 한마디도 못했는데 외국 출장 시 영어를 긴요하게 썼다고 즐거워한다. 이제는 외국의 문화를 알기 위해 좀 더 깊이 있는 문장들을 공부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더 멋진 일탈을 위해 적은 노력은 필요하다.
지금은 6개월 전과는 환경도 마음도 많이 달라졌다.
친한 지인이 오늘 톡으로 '힘은 멈춤에서 나온다. 음악도 숨이 있어야 그 여운을 즐길 수 있다'는 내용을 보내왔는데 그 글귀가 마음에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