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공로연수

푹 꺼진 소파처럼 볼품 없어졌지만

by 이소희

새 학기, 새내기, 첫사랑, 모두 풋풋한 설렘과 기분 좋은 긴장감을 주는 단어다. 이렇게 가슴 설레게 했던 새로운 시작도 시간이 흐르면 끝이 나는 그때가 어김없이 온다.

아직 공직을 떠난 지 6개월이 안 됐는데 남편까지 현직을 떠나면서 우리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매일 마음공부를 하면서 스스로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도 가끔은 지금 내가 뭐 하고 있지?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스치는데 남편은 또 어떨까? 끝이 나는 시간은 시작할 때의 가슴 뛰는 설렘이 없지만 그동안의 했던 일을 마무리하는 더욱 소중한 시간이다.


늘 입던 운동복처럼 오랜 기간 같이했던 남편은 익숙함이란 이름으로 항상 내 옆에 있어 주었던 소중한 존재다. 불필요함을 덜어내고 서로에게 자연스러워진 관계가 부부다. 불 꺼진 방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방한 쪽에 둔 물건처럼 서로에게 편하고 고마운 존재다. 그런 남편이 한 달 후면 30년을 넘게 근무한 직장에서 공로 연수란 이름으로 현직을 떠난다.



젊은 시절 가졌던 열정이야 이제는 옅어질 때로 옅어졌다. 다른 감정은 다 무뎌졌는데 이상하게도 연민이란 감정만 유난히 진해진다. 점점 가늘어지는 팔뚝을 보면서,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며 약병의 작은 글씨를 보느라 미간을 잔뜩 찌푸린 모습을 보면서, 아픈 어깨에 오늘도 파스를 붙여주면서, 짠한 마음이 든다. 믿음직했던 남편은 이제 내 손길과 눈길이 닿아야 안심이 되는 존재가 되었다. 긴 세월을 같이할 수 있었던 건 사랑도, 인내도, 용서도 필요했겠지만, 그 어떤 감정보다도 연민이란 감정이 작용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지난 30년 세월의 무게에 푹 꺼진 소파처럼 볼품없어졌지만 서로의 체형에 맞춰져 익숙할 때로 익숙해진 우리는 남은 삶을 더 잘살아 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우린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같이 해보자고 했다. 낯선 도시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차창 밖 풍경에 시선을 뺏기며 오로지 여행에 집중해 보자고 했다. 섬에 가서 한가롭게 나란히 걸어보자고 했다. 창문 너머로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걱정 없는 잠을 자고 맑은 햇볕을 마음껏 쬐며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내자고 했다. 너무 심심하면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보자고 했다. 이제는 세상일에 쫓기며 끌려가지 않고 느리게 살며 가치 있는 삶을 살아보자, 약속했다. 빠르게 살면서 자나친 것들 다 눈에 담아 가며 살아 보자 했다.


퇴직하고 먹어도 먹어도 늘 허기가 느껴졌었다. 그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라면 봉지를 뜯어 생라면을 씹어 먹으며 쓸쓸함을 삼키고 또 삼켰던 경험을 이제 곧 남편도 하게 될 거다.

그렇지만 곧 인생에서 혼자 있는 시간도 중요하다는 것을, 외로운 시간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될 거다.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잊고 살았던 진짜 본인의 모습을 보게 될 거다. 미지근한 감정으로 살면서 허기진날, 속 쓰린 날엔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그런 부부로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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