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서툰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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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희


털어내고


어린 시절 서울 변두리 허름한 집에서 엄마와 아빠, 네 남매 여섯 식구가 복닥복닥 뒤섞여 살았다. 비좁은 방에 함께 지낼 때 간절하게 방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했다.

결혼하고도 시부모님과 시동생, 시누이랑 한집에서 살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한 갈망이 컸다.

직장과 가정생활, 대학원 수업까지 병행하다 보니 일상은 작은 틈도 허락하지 않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젊은 날, 나는 가끔 기쁘고, 슬프고, 행복했지만, 많은 에너지를 소진한 탓에 늘 고단했다.

불쑥 혼자 있고 싶다는 호사스러운 생각이 들긴 했지만, 현실에 반하는 생각은 망상에 그칠 뿐이었다.


직장에서 인간관계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나의 퇴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도저히 같이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인해 갈등이 깊고 커져 이루어진 돌발적 선택의 결과였다.

압도적 힘의 크기에 밀렸다는 생각이 분노로 이어져 견디기 힘든 시간을 홀로 감당해야만 했다.

수도 없이 그게 맞느냐? 고 정말 그렇게 해야 했냐고? 답도 없는 질문을 허공에 던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토록 꿈꿨던 혼자만의 시간을 상처를 후벼 파는 데 쓰고 있었다.

깊게 드리워진 먹구름도 언젠가는 걷히기 마련이다. 분노로 어두워진 내 상처도 이젠 좀 무뎌졌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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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는 '걷기는 가장 훌륭한 약이다'라고 말했다.

힘든 시간을 견디기 위해 나는 걷기를 선택했다.


나른해지는 두 시 반, 동생과 가벼운 산책을 하고 있다.

2월이지만 이 시간 햇살은 따습고 한없이 다정해 걷기 좋은 시간이다.


춥고 어두웠던 겨울이 끝나가는지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과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걷는 것은 몸을 천천히 쓰며 내 상태에 집중하고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분주했던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매어있던 근심과 걱정에서 조금 벗어날 수도 있다.


구석구석 걷다 보면 평소 못 보던 것이 눈에 들어오고 주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지난밤에 까마귀가 동네를 한바탕 휘저어 난리가 난 보도 위를 길게 걷다가 자동차 경적, 택배차 물건을 꺼내는 부산한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오늘은 몇 년째 덤프트럭이 오가던 공사장 가림판이 철거되고 신축 아파트가 위풍당당하게 눈앞에 나타나 놀랐다. 언제 이 아파트가 다 지어졌지? 아는 직원이 아파트 청약이 돼서 이사 올 거라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곧 그녀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하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파트 모퉁이를 지나면 제법 규모가 큰 공원이 나온다.

공원은 벌써 봄이 오는 것 같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엄지손톱만큼 자란 새순이 삐죽삐죽 올라오고 있다.

한 무리의 참새 사이로 까치 두 마리가 날개를 펼치고 앉자 참새들이 부르르 날아가 버린다.

이 공원 둘레길은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걷기 좋은 길이다. 둘레길과 연결된 나지막한 산을 넘으면 인근 대학교까지 이어져 매일 이 길만 걸어도 건강해질 수 있다.


동생과 나는 5살 차이로 성격이나 취미가 전혀 다르다. 동생은 춤과 운동을 좋아하지만, 나는 책을 좋아한다.

평소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지라 헉헉대며 걷다가 벤치라도 나오면 쉬었다 가고 싶어 얼른 앉아버린다.

가져온 커피를 컵에 따르면 뜨거운 김이 바람에 날려 기분 좋게 후각을 자극한다.

동생은 다이어트 댄스를 배우면서 살이 빠진 이야기랑 조카 자취방을 구하기 위해 서울에 다녔던 일 같은 소소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생각해 보니 결혼 후에 동생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평일 오후, 느긋하게 공원에 앉아 동생과 깔깔대며 웃다 보니 한껏 행복해지는 기분이다.


용혜원 시인은 '내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란 시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라는 울타리 안에 자기라는 생각의 틀에 꼭 갇혀 있는 사람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희망을 갖게 한다.' 말한다.


나를 내 안에 가두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여유 있고 적당히 활기찬 생활을 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공직 생활이 원하는 데로 끝나지 않았지만, 난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다고 다독이다 보면 무거웠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