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래야만 했다.
퇴직 10개월이 지나고 드는 생각
이상한 소문
퇴직한 지도 벌써 10개월이 지났다.
내가 직장을 다녔던 사람인가 조차 의심이 갈 정도로 지금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바쁠 것 없는 느긋한 아침도,
생선을 구워 정성껏 차린 점심 만찬도,
저녁 시간 운동으로 맘껏 할애해 사는 일상이 원래부터 그런 삶을 살아온 것처럼 익숙해졌다.
명예퇴직을 하고 나서 한동안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 날 친한 동료가 전화해서 100억대 부자라 직장을 때려치웠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정말이냐고 물어봤다.
며칠 있다가 또 다른 동료는 상속을 많이 받아 그만뒀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웃으며 전해줬다.
어이없는 말에 그런 게 아니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믿고 싶은 말만 믿지 다른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난 이미 부자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부자
소문처럼 돈 많은 부자는 아니지만 분명 퇴직을 하고 부자가 된 것 사실이다.
시간 부자, 여유 부자, 마음 부자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월급 대신 약간의 연금으로 살다 보니 현직에 있을 때보다 수입이 턱없이 줄었다.
수입이 줄어드니 생각 없이 저지르던 소비 패턴이 줄었다.
소비의 대부분은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스트레스나 분노를 풀기 위해 했던 소비라서 큰 불편함이 없다.
물건을 구매하던 습관은 줄어들었지만, 경험과 추억을 만드는데 기꺼이 시간과 돈을 지불하고 산다.
화장대를 가득 채우던 화장품들도 점점 줄어들어 샘플까지도 챙겨 바르는 살뜰한 주부가 되었다.
영양소까지 골고루 챙겨 만들어 먹는 즐거움까지 얻었다.
좋아하는 미술 관람은 정보를 검색해서 얼리버드로 티켓팅을 해 40% 정도 할인을 받아 즐겁게 다녀온다.
비싼 호텔이나 콘도 대신 휴양림 안에 숙소를 이용하면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안락한 방을 구할 수 있다.
산책할 수 있는 공원, 노을이 지는 바다,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가을 산, 나무가 무성한 숲을 걷는 데는 시간 부자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무게를 덜어내는 삶
지난달 모임에서 아는 지인이 재미 삼아 내 사주를 봐줬다.
작년 내 사주에 큰 변화와 이동이 있을 사주였다고 한다.
퇴직을 결정한 선택은 내가 내렸지만, 그 당시에는 다닐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선택이란 나 스스로 결정하는 것 같지만 주변의 환경과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의 작용을 받는 것 같다.
나는 최선의 선택을 고민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이후, 삶은 버거운 일이었지만 참 열심히 살아왔다.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퇴직하면서 배웠다.
앞으로 나가던 삶만 살았던 습관으로 아주 가끔 공허함이 밀려들지만 이젠 점점 잦아들어 간다.
퇴근하고 일이 끝나도 늘 스위치가 꺼지지 않던 삶에서 드디어 완전한 해방을 맞이한 거다.
숨 쉴 구멍 없던 직장생활에서 이제야 편안해졌다.
소문처럼 돈 많은 부자는 아니더라도 불편하진 않다.
작고 사소한 일을 직접 더 하면 그만이다.
늘 어깨가 아프고 무거웠던 나의 삶에서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보니 참 편안하다.
나에게 퇴직하고 후회하지 않냐고 가끔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종이상자에 보관해 둔, 오래된 편지를 가끔 꺼내 읽듯 그때를 되돌아본다.
후회 없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빌딩이 높으면 그림자는 길어지는 것처럼
많이 가질수록 어깨는 무거워지는 법이다.